CULTURE

THE WAVES

프로필 by 전혜진 2023.12.19
<Snow Shapes>(2023). 화집 <Shapes>의 표지작이다.

<Snow Shapes>(2023). 화집 <Shapes>의 표지작이다.

올해만 두 권의 화집을 엮었다. 지난 9월 출간한 <Shapes>는 어떤 풍경을 담고 있나
2022년 스코틀랜드에서 작업하던 시절, 작업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바위와 국내에서 관찰한 바위의 형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 그 형상들은 서로 닮은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이 책에서 바위에서 눈으로 형상을 이어가며 덩어리의 감각을 그려보고 싶었다. 강릉과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부터 제주까지. 내가 바라봤던 풍경 또한 일정한 리듬과 질서 속에서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Shapes>는 2021년 독일국제책디자인공모전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수상한 화집 <Feuilles>와는 확연히 다른 계절감이 느껴진다
주로 돌과 눈의 형상을 표현하다 보니 채도가 낮다. 색에 대한 인상보다 형태감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일부는 의도적으로 채도를 낮춰 작업했다. 더 명료하고 담백하게 대상을 그리려 했달까.
 
 
 <Night Face>(2021). 엄유정은 ‘밤 얼굴’ 시리즈에서 어떤 얼굴들을 포착한다.

<Night Face>(2021). 엄유정은 ‘밤 얼굴’ 시리즈에서 어떤 얼굴들을 포착한다.

연이어 엮어낸 <Night Waves>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형상이 한 장에서 만난다. 두 대상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있나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진 ‘밤 얼굴’ 시리즈와 같은 시기에 그린 식물 드로잉을 한 장에서 만나도록 배치했다. 그림이 여러 장 완성되면 그림 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생긴다. 평소 관찰하는 모든 대상을 평등한 관계로 여기는데, 어떤 사람을 그릴 때 구체적으로 누군인지 설명하기보다 순간의 인상에 집중하는 태도가 나무를 관찰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한다. 이 책을 통해 두 대상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싶었다.
 
인공보다 늘 자연에서 낯선 감각을 느꼈다고 말했다. 왜 자연을 그리나
주변 세계를 가까이 관찰하고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익숙한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림은 내가 세계를 감각하고 경험하는 과정이다. 한 마디로 그림을 통해 나도 새롭게 주변 환경을 인지한다. 도시 삶에 익숙해서인지 자연에서 늘 생경한 감각과 형상을 발견하는 것 같다.
 
 
<Bush Shape>(2023).

<Bush Shape>(2023).

2017년 1월, 기록적인 한파로 서해가 얼었다는 보도를 우연히 보았고 그때 대부도에 찾아가 얼어붙은 해빙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전에 아이슬란드에서 빙하를 그리는 작업을 했는데, 국내에서도 유사한 대상을 좀 더 관찰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대부도에 바닷물이 얼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찾아가게 됐다. 하지만 그리는 대상을 자연으로 국한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다른 무엇으로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작업의 연장선이자 또 하나의 갤러리”라고도 했다. 화집과 전시를 유기적으로 엮는 것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전시가 그동안의 작업을 하나의 공간에 펼쳐 보이는 형식이라면, 책은 종이를 넘기며 한 장 한 장 겹쳐진 시간과 만날 수 있다. 2014년부터 총 여섯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내 작업을 가능한 범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는 아카이브라고 생각한다. 전시 형태는 실제 공간뿐 아니라 인터넷, 책 혹은 또 다른 무엇으로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난 10월에 출간한 올해 두 번째 화집 <Night Waves>.

지난 10월에 출간한 올해 두 번째 화집 <Night Waves>.

생명력이 느껴지는 자연물과 달리 ‘밤 얼굴’ 시리즈 등에서 보여지는 특정한 ‘얼굴’은 가끔 공허해 보이기도 혹은 지나치게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단순화된 선과 형태, 색감으로 표현한 ‘얼굴’이 가리키는 특정 대상은
인물 드로잉은 생활하듯 자연스럽게 해오던 것인데, 구체적인 누군가를 지칭하기보다는 내가 경험한 것을 몸의 표정에 빗대 이야기하는 것과 가깝다. 손과 몸의 기울기, 눈의 위치, 고개의 각도에 따라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
 
‘밤’의 정서에 주목하기도 했다. 당신의 작품에서 밤은 어떻게 읽히길 바랐나
‘밤-긋기’ 시리즈를 작업할 때 주로 밤에 했다. 여름날은 덥고 산만한지만 밤은 고요하다. 그림과 나, 둘만 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많은 것이 침잠하고 그 이후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장면을 다뤄보고 싶었다.
 
 
 2021년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엄유정: 밤 - 긋기> 전시.

2021년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엄유정: 밤 - 긋기> 전시.

작업실을 열 번이나 이동했다. 청주와 경기도, 아이슬란드, 문래동과 홍대, 망원동까지. 작업실 장소가 특별한 힘을 발휘하나
분명 낯선 장소가 주는 새로운 에너지가 있다. 작업실 이동은 더 나은 장소를 찾아 전전한 것이다. 언젠가는 한 공간에 적을 두고 작업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력은
작업마다 고비처럼 느끼지만, 결국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 아닐까?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그릴 때 대부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대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며 관찰하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더 나은 방법을 시도하며 다시 뭉개는 과정을 반복하기도 한다. 물론 잘될 때도 있고, 먼 길을 돌아갈 때도 있고, 완성 기준도 계속 변하지만 그런 데에서 매력을 느낀다.
 
 
올해 에이라운지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Three Shapes> 전경.

올해 에이라운지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Three Shapes> 전경.

올해는 어떤 겨울을 나고 싶나
어쩌다 보니 많은 일을 했던 한 해가 지나간다. 이번 겨울은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느린 속도로 시간을 채우고 싶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