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남자 후배가 레이스가 곱게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왔다. “어머! 이거 여자 거 아니니?”라고 은연중에 말한 에디터에게 후배는 거세게 받아쳤다. “이거 남자 컬렉션이에요.” 평소 대담하고 편견 없는 패션을 즐기는 그이기에 당연히 여자 옷이겠거니 했는데…. 그러고 보니 디테일은 영락없이 여자의 옷이지만 사이즈는 떡 벌어진 어깨를 무리 없이 소화할 정도로 남자 옷 그대로였다. 새삼 남자 옷이 이렇게까지 섬세할 수 있구나 느꼈다(떠올려보니 에디터도 비율을 따지자면 남자 옷이 더 많다).
젠더리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여자가 남자의 박시한 수트를 입는 것, 남자가 여자의 우아한 주얼리를 착용하는 것에 거부감 없는 시대다. 하지만 젠더리스라는 말 속에도 엄연히 남과 여는 존재한다. 서로의 성별은 인정하면서 각자 그 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지금도 시대는 변하고 있고, 어느덧 우리 사회는 ‘남과 여’를 나누는 대신 사람 자체를 보기를 원한다. “지금은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 시대라고요!” 또 한 번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대체 ‘젠더 뉴트럴’이 뭔데? 사전을 빌려 설명하자면 이렇다. 남녀 구분 자체를 없애고 사람 자체로만 생각하려는 움직임.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성에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필요한 덕목으로 서로의 성을 인정하고 벽을 허무는 ‘젠더리스’보다 사람 본연의 ‘휴머니티’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레드 카펫에 등장한 배우 티모시 샬라메.
그리고 이런 자기표현의 방법으로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패션이다. VTMNTS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구람 바잘리아는 2023 S/S 시즌 컬렉션을 선보인 후 이렇게 말했다. “이 컬렉션은 성 평등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신념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가 목소리를 내고, 소수가 다수가 될 때다. 인류는 대량생산되는 생명이 아니므로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하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패션도 변해야 한다”고. 그의 컬렉션에는 깡마른 모델 대신 다부진 체격의 모델이 아찔한 크롭트 톱을 입는가 하면 날렵한 쇼츠에 사이하이 부츠를 신고 우아하게 런웨이를 활보했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옷을 빼앗아 입은 것이 아, 오직 ‘그’를 위한 룩이었다. 14년 만에 시즌 캡슐 컬렉션으로 남성복을 함께 선보인 미우미우에서는 치마를 입은 여리여리한 소년과 터프한 바이크 룩을 입은 소녀가 공존한다.
자신을 남성복 혹은 여성복 디자이너라 부르지 말고 ‘인간 디자이너’로 불러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성별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컬렉션이 아닐까? 또 실험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는 디온 리는 2022 F/W 컬렉션에서 특유의 섹슈얼한 피스로 남성의 보디라인을 드러냈다. 레이스 글러브, 오프숄더 니트, 크롭트 후디드 티셔츠, 미니스커트 등으로 꾸민 런웨이 속 모델들은 각자의 성에 맞춘 역할을 하기보다 그저 디온 리의 룩을 입은 모델 역할에 충실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판타지에서 영감을 받은 이곤 랩은 반짝이는 스팽글 소재, 보디라인이 드러나는 쇼트팬츠를 입은 모델들로 런웨이를 꾸몄고, Y 프로젝트는 코르셋이 연상되는 관능적인 탱크톱에 데님을 매치한 룩으로 남과 여의 경계에 선 듯한 과감한 룩을 선보였다. 치마를 입은 남자, 수트를 입고 남자인 척하는 여자를 그려온 그간의 젠더리스 룩과는 비슷한 듯 묘하게 다른 제3의 분위기를 풍긴다. 남과 여가 아닌, 그냥 ‘인간’으로서 패션을 받아들일 시기를 맞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남녀가 아닌, 사람의 패션에 익숙해지겠지. 혹자는 말한다. 아직 ‘핑크색’과 ‘스커트’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젠더 뉴트럴’을 트렌드라고 강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배우 티모시 샬라메는 그 어떤 여배우보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레드 홀터넥 수트를 입고 베니스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의 왕자가 됐다. 그리고 다수의 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그를 두고 패션 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평가한다. 도전하는 자에게 분명 용기를 불어넣는 행보임에 틀림없다. 당장 거리에서 홀터넥에 미니 쇼츠를 입은 남를 자주 보긴 힘들겠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년 남자 배우가 진주 목걸이를 하고 TV 쇼에 출연할 줄은, 할리우드 남자 배우가 스커트를 입고 공식 석상에 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