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에 대한 여섯가지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단상 || 엘르코리아 (ELLE KOREA)
FASHION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섯가지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단상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나의 집. 그래서 때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몸에 대한 6인의 시선

이마루 BY 이마루 2022.07.12
 

연약한 몸을 과시하는 용기

안아랑(플로리스트)

‘Nuptials’(2022)

‘Nuptials’(2022)

샤워 후 거울에 비친 내 마른 몸을 유심히 관찰할 때가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둥근 어깨, 미묘하게 높낮이가 다른 가슴, 살짝 말캉한 뱃살, 엉덩이 주변의 튼살….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솔직하고 내밀한 시간. 목선에서 어깨, 가슴에서 허리와 골반으로 이어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선과 면의 조화에 감탄하다가 이내 유두의 돌발적인 존재감에 웃음이 피어난다. 런던을 떠나 아테네에 정착한 세라미스트 클레멘타인 키스 로시(Clementine Keith-Roach)에게 매료된 것 역시 거대한 테라코타 오브제 표면에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가슴 세 쌍이 불쑥 솟아 있는 작품 ‘루파(Lupa)’ 때문이었다.
 
‘Partition’(2022)

‘Partition’(2022)

테라코타의 따뜻한 색과 질감, 작품의 우아한 형태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오브제 곳곳에 도드라진 가슴과 유두 형상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클레멘타인이 이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는 다분히 진지하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급격한 신체 변화에 당황한 그는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는 몸에서 죽음을 감지했고, 손쉽게 무력해지는 몸 앞에서 순식간에 겸허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연약함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약함을 드러내고 과시하며 한계에 맞섰다. 자신의 몸이나 엄마의 가슴, 주변 여자 친구들의 팔다리를 본뜬 캐스팅이 존재감을 뽐내는 오브제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생명력을 뜨겁게 축복하면서 살아가는 클레멘타인의 담대한 마음을 닮고 싶다.
 
 

신체 그 이상의 몸

서동현(카카오 브랜드미디어 팀 콘텐츠 에디터)

‘Rhythm 0’(1974)

‘Rhythm 0’(1974)

사춘기 시절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다. “목젖을 타고 쭉 내려가면 쇄골이 시작하는 움푹 팬 곳 있잖아. 거기를 중심점으로 잡고 양쪽 유두를 선으로 연결했을 때, 정삼각형이 되면 이상적인 가슴 모양이래.” 이후 샤워할 때마다 거울 앞에서 가상의 선을 그리며 ‘혹시 이등변 삼각형은 아닌지’ 늘 확인하곤 했다.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사원 설계에 적용해야 할 ‘몸이 좋은 남자의 비율’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그것에 영감을 받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처럼 나는 가상의 각도기와 연필을 가지고 몸의 비율을 따졌다. 이유는 당시의 나에게 몸은 보기 좋은 몸과 그렇지 않은 몸,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몸이 예술의 언어이자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어른이 된 후였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자신의 신체 위에 고통과 슬픔, 상처를 새겨넣고 예술이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1974년 작 ‘Rhythm 0’에서 그는 테이블에 72개의 물건을 놓고 6시간 동안 동상이 되기로 한다. 관객은 그중 어떤 물건을 집어 어떤 행위를 가하든 책임이 없다. ‘대상화된 신체’는 3시간 만에 끔찍한 폭력에 노출된다. 옷이 발가벗겨지고 피가 난 ‘동상’을 보면서 내 머릿속의 ‘정삼각형’은 사라졌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적 인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몸이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몸을 보지만 말고 읽어보라’고. ‘우리의 몸은 이런 말을 담고, 옮기고, 해낼 수 있다’고.
 
 

우리는 ‘저것’이 아니다

김겨울(유튜브 ‘겨울서점’ 운영자, 작가)

‘Omnipresence-Surgery’(1993), Orlan.

‘Omnipresence-Surgery’(1993), Orlan.

오를랑(Orlan)은 해골을 잡고 있다. 양손으로 해골의 양 옆을, 자신의 분신인 것처럼 정면이 보이도록 잡고 있다. 해골은 실제로 오를랑의 분신이다. 오를랑의 얼굴에는 붉은 선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를랑은 곧 해골에 덧씌워진 피부로, 갈아내고 당기고 세워야 할 무엇으로 인식될 것이다. 뒤에서는 의료진 두 명이 수술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채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오를랑은 막 수술을 받을 참이다. 오를랑은 광대뼈와 코와 턱을 바꾸게 될 것이다. 오를랑은 실제로 성형수술을 받는 퍼포먼스를 여러 차례 했던 아티스트다. 1990년 ‘성 오를랑의 환생(The  Reincarnation of Saint-Orlan)’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에서 오를랑은 서양 미술의 대표적인 미녀들, 즉 보티첼리의 비너스, 제롬의 프시케,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여러 미녀들의 얼굴을 조금씩 가져와 자신의 얼굴에 재현한다. 수술받는 동안 오를랑은 의식을 유지했고, 수술 과정은 촬영됐다. 여성의 외모란 무엇일까? 나는 붉은 선이 그어진 오를랑의 얼굴에서, 또 사진을 찍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녀가 곧 수술을 받으리라는 사실에서 그녀가 유도했을 섬뜩함을 느낀다. 내 얼굴과 몸은 정육점의 고기가 아니라는 확신, 그러나 과연 그런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솟아오른다. 나는 일종의 반항심도 느낀다. 아니, 나는 저게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저것’이 됐다. 내가 ‘저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몸들이 끈끈하게 연결된 세상에서

이우연(페인터)

‘Finding/Sacred Space’

‘Finding/Sacred Space’

누워 있는 몸, 구부린 몸, 춤추는 몸, 환희에 도취된 몸…. 여성과 몸과 몸짓을 유연하고 거침없는 선으로 그려내는 알렉산드리아 코에(Alexandria Coe)의 누드화를 보면 몸에 대해 홀가분해진다. 절제된 색과 자유로운 구도, 과감히 생략된 디테일부터 여성에 대한 전통적 규범과 가치관 역시 흐릿해지는 기분이랄까. 알렉산드리아가 표현하는 몸은 언제나 솔직하고 유쾌하다. 균형 잡힌 몸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이야기가 기록된 몸인 건 확실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쥔 여성만이 알렉산드리아의 그림처럼 언제나 확실한 제스처와 자세를 취할 수 있을 테니까.
 
‘Arianna and Adrian’

‘Arianna and Adrian’

주체적인 여성이야말로 순간의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채 진정으로 뜨거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긍정이 이기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내 몸에 대한 인정과 긍정은 출발지이지 종착지가 아니다. 인테리어 스튜디오 이스콜리두(Escolhido)와의 인터뷰에서 알렉산드리아는 “가부장제와 자유주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자유롭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더라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사랑만이 최후의 목표가 돼야 한다. 이는 그가 남녀 간의 정사 장면을 즐겨 묘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몸들이 끈끈히 연결되며 흥은 더욱 강렬해진다. 순수한 인간애로 가득한 그의 그림처럼 자유롭게 춤추고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몸의 도발과 아이러니

한지완(작가)

‘A Subtlety, or the Marvelous Sugar Baby’(2014)

‘A Subtlety, or the Marvelous Sugar Baby’(2014)

‘한국 여성’으로서 내 몸을 생각할 때 나는 늘 피해자성을 정당하게 얻으려 애쓰다 위축된다. 내 여성의 몸은 이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성적 착취의 대상이거나 반대로 그럴 가치가 없어 외면 혹은 조롱당하는 것이 돼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 여성’으로서 카라 워커(Kara Walker)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고정관념을 뒤집고, 반전시키고, 기괴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2014년 5월 브루클린의 도미노 설탕 공장에 설탕으로 만든 조각 작품 ‘A Subtlety, or the Marvelous Sugar Baby’를 세웠다. 거대한 흑인 유모 형상의 스핑크스를 (역사적으로 아동들을 착취했던) ‘뉴욕의 포식자’라고 표현하며 ‘서틀티(대부호의 식탁을 장식하는 설탕 조각상)’라는 이름을 붙였다. 흑인의 모습이지만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착취자인 동시에 착취 대상으로 표현된 이 조각상에 대한 반응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은 이 조각상의 ‘섹스어필’에 주목했다. 그들은 유두나 소음순에 혀를 대는 등 성적으로 조롱하는 셀카를 찍어 SNS에 올렸다. 그리고 카라 워커는 그런 반응까지 예측했다고 밝혔다. 천박한 반응까지도 마치 설탕이 천천히 녹아내리면서 설탕 정제의 노동 착취 역사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이 사회의 일면을 비추는 작품의 일부가 된 셈이다. 나는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싸움을 거는’ 이 도발적이며 아이러니로 가득 찬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육신으로서의 몸

박참새(북 큐레이터, 〈출발선 뒤의 초조함〉 저자)

‘Naked of Back’(1896), Edvard Munch.

‘Naked of Back’(1896), Edvard Munch.

“내가 다스려야 할 것은 육신이었다(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중 ‘그녀가 다스려야 할 것은 육신이었다’ 변용).” 살이란 그저 뼈를 감싸고 있는 지방과 근육 덩어리일 뿐인데, 육신은 언제나 나를 뛰어넘어 여기저기 활보하고 다녔다. 모부의 입에서, 친척의 눈에서, 뜻 모를 시선을 던지는 길거리의 행인들 속에서. 내 육신은 언제나 내 바깥에 있었고, 24시간 평가받고 있었다. 대체 몸이 무엇이길래? 별안간 몸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독되고 오해받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른 여자들의 몸을 찾아보았다. 볼 때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놀라워서, 경이로워서, 비틀리거나 너무나 정상적으로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그저 몸뿐이었기 때문이다. 묘사된 육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해석되고 인용되는 모든 방식에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나처럼 감흥이 없기를 바랐다. 묘사된 몸에 감응한 나머지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거나 혹사하거나 찔러대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이거나 혹은 굶기거나 하는 식의 연쇄적 반응이 그 누구에게도 없었으면 했다. 말라비틀어진 몸을 갈망하며 목구멍을 쑤셔대던 내가 기억난다. 여전히 내가 다스려야 할 것은 육신이다. 신체의 감옥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영원한 사실처럼 느껴질 때마다 그려진 몸을 본다. 곡선을 본다. 그저 몸일 뿐인 그것을 천천히 바라본다. 그러면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그토록 보았으면서도 모르고 살았던 얼굴이 그에게도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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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마루/ 이경진/ 류가영
    COURTESY OF CLEMENTINE KEITH-ROACH/ PPOW GALLERY
    COURTESY OF MARINA ABRAMOVIC ARCHIVES
    COURTESY OF ALEXANDRIA COE/ M.A.H
    COURTESY OF KARA WALKER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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