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스타그램 @yangchikii
2020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 7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공기와 같은 자유는 불과 75년 전, 많은 독립투사들이 우리나라,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물심양면으로 투쟁한 덕분에 얻을 수 있었지요. “동북 3성에 사는 250여만 명의 동포는 사정이 본국과 다르지 않고, 150여만 명의 동포가 사는 러시아령은 공산 국가라 민족운동을 할 수 없고, 일본에 사는 40만~50여만 명의 동포에게도 의뢰할 형편이 안되고…”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은커녕 임시정부청사 월세도 내지 못할 만큼 심각한 자금난을 겪으며 세계 곳곳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미국 본토와 하와이, 중미 등을 아우르는 미주 동포는 1만여 명(지금의 LA 교민은 67만 명). 김구 선생의 편지를 받은 교민들은 주저하지 않았지요. 미주뿐만이 아닙니다. 가깝게는 동남아, 인도, 우즈베키스탄부터 멀게는 멕시코와 쿠바, 네델란드, 벨기에까지, 전 세계 24개국에 1천 곳에 달하는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사람과 사소한 역사는 없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박건호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국사책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먼 나라 곳곳의 크고 작은 독립운동 스폿, 그중 5곳을 소개합니다. #광복절 기념 #국뽕 랜선 여행, 함께 떠나요!
대한인비행가양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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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와 포틀랜드 중간쯤에 위치한 윌로즈(Willows)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도시예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1920년 윌로즈에 한국 최초의 한인비행학교와 훈련소를 세웠습니다. 비행 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훈련을 하려면 응당 비행기가 필요하겠죠.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김종림은 비행기 2대와 함께 비행장 건축, 항공기 연료 등 비행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을 지원했어요. 6월 22일 첫 비행기가, 6월 24일 두 번째 비행기가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7월 최초로 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죠. 하지만 1920년 11월 어마어마한 홍수로 재정 지원의 키맨 김종림이 파산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곧 학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뉴욕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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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1921년 맨해튼에 문을 연 뉴욕한인교회는 1927년 콜롬비아 대학교 근처에 예배당을 마련해 지금에 이르고 있어요. 해방 이전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은 100명 내외였는데, 대부분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추정됩니다. 이곳은 교회인 동시에 미국 동북부 독립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죠. 안익태가 애국가 악상을 떠올리며 연주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도 보관되어 있고,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뉴욕에서 유학할 때 자주 방문한 곳이었으며, 서재필, 조병옥, 이승만 등 독립지사들이 이용한 숙소와 회의실도 있어요. 2021년 교회 안에 독립기념관도 만들어질 예정이니 맨해튼을 가게 된다면 꼭 한번 들러 보세요.
주미 화성돈 대한제국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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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최초의 미국 대사관은 1888년 미국 워싱턴DC에 세워졌어요. ‘주미 화성돈(워싱턴의 한자식 이름) 대한제국 공사관’이라 이름 붙인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공사(지금의 외교관) 박정양이 워싱턴 시내의 한 건물을 빌리면서 시작되었죠. 이후 1891년 12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에 이르는 건물을 구입해 공관으로 삼았습니다. 구입 비용의 절반은 고종황제의 비자금이었다고 하죠. 빅토리아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공관의 1층은 공식 업무용, 2층은 직원과 가족들을 위한 숙소, 3층 홀은 연회장으로 사용했어요. 당시 공사의 초청으로 미국의 영부인이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이곳 또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우리나라 문화재청 관리 아래 기념관으로 남아 있어요.
뉴델리 레드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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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붉은 사암으로 만든 붉은 요새, 인도 뉴델리의 레드포트는 인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델리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예요. 1638년부터 1648년까지, 장장 11년에 걸쳐 지어졌죠. 인도의 초대 총리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의 독립군도 활동했다는 사실. 1943년 8월, 인면전구공작대로 선발된 9명은 2차대전 당시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레드포트에 파견와 번역, 선전 방송 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해요. 일본어에 취약한 영국군이 영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가능한 독립군의 도움으로 일본군의 문서를 번역해 전략을 짜고,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본어 방송을 만들어 내보낸 거죠. 레드포트 안에는 여전히 영국군이 만들어 놓은 연병장이나 건물들이 남아 있어요. 우리 독립군이 정확히 어느 시설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요.
숭무학교 군사훈련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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