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까지 해가 지지 않고 눅눅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바야흐로 여름이다. 봄의 보슬비와는 완전히 다른 여름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첫 여름비가 내렸다는 건 신발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고무장화를 꺼낼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무장화의 정식 명칭은 웰링턴 부츠다. 웰링턴 부츠는 1814년, 웰링턴 지방의 아서 웰슬리가 신발 메이커에게 부드러운 소가죽으로 부츠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데에서 유래한 이름. 이후 1856년, 미국에서 스코틀랜드로 온 헨리 리 노리스가 이 부츠를 보고 고무 재질의 부츠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헌터 부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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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 브리티시 러버(지금의 헌터 회사의 전신)’는 원래 다양한 고무 제품을 생산하던 회사였다. 그들이 부츠 생산에 주력하게 된 건 1차 세계대전 이후, 즉 질퍽거리는 진흙에서의 혹독한 전투를 겪은 영국군이 약 200만 켤레의 고무 부츠를 주문한 뒤의 일이었다.




헌터는 2013년, 알라스데어 윌리스 (Alasdhair Willis)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하면서 새롭게 도약한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알라스데어 윌리스는 영국 월페이퍼 매거진의 창간 멤버이며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Established & Sons)를 세계적인 컨템퍼러리 디자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CEO였다.
그는 헌터 오리지널 컬렉션을 론칭해 런던에서 네 차례의 런웨이 쇼를 선보였고, 농촌과 가드닝, 야외공연 등을 위한 라인인 ‘헌터 필드’를 론칭했다. 오랫동안 그저 ‘고무 부츠를 만드는 브랜드’로 인식되던 헌터가 그 영역을 넓힌 것이다. 헌터는 이제 부츠뿐 아니라 티셔츠나 헌팅 코트 등의 의류, 비치 샌들, 백 등 비바람과 진흙을 견디는 모든 것을 만든다.



케이트 모스와 피트 도허티, 스텔라 매카트니와 알라스데어 윌리스, 그리고 수키 워터하우스와 릴리 도널슨. 마치 같은 날 찍힌 것처럼 보이는 위의 세 장의 사진은 각각 2005년, 2014년 그리고 2016년에 촬영된 것이다. 공통점은 두 가지. 그들이 헌터 부츠를 신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음악 축제가 열리지 않는 이상한 여름을 지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저 시절의 즐거움을 그리워한다. 페스티벌에 갈 수 없다면 내일은 세찬 비라도 내려 헌터 부츠를 꺼내 신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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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