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LIFE

결혼생활에서 거리 두기?

각자도생의 시대. 결혼생활에까지 '각자'라는 단어를 심어둔다는 것은 언뜻 불협화음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각자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질 일은 드물다.

BYELLE2020.04.01
 
한집에 살다 보면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할 거라 생각했다. 페미니스트이길 희망하는 내가 발끈할 일이 빈번할 거라 각오했다. 결혼 후 의외로 싸울 일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내 무심함은 각자의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 미덕으로 둔갑했고, 남편의 자취력은 집안 살림에서 십분 발휘됐다. 약간의 혼돈기를 거친 후 우린 결혼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비교적 일찍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공간에 우겨 넣어졌다 해서 득도하듯 네 맘이 내 맘 같아질 리 없다는 걸 우린 알고 있었다. 자기 몫의 행복은 스스로 알아서 챙기면 되는 법이다. 결혼 전에도 각자 잘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됐다. 우리가 맺은 협정 아닌 협정은 결혼이 각자의 세계를 뒤흔드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패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누군가 결혼생활의 소회를 물으면 우리는 낯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좋고,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다소 재수 없는) 답변을 돌려줬다. 사실이 그랬다. 그렇게 평온한 시기가 이번 생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딱,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말이다.  
 
출산휴가 내내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배속에 있던 아이가 배 밖으로 나온 이후의 일상은 너무도 생경했다. 인생 최악의 컨디션으로 한 손엔 젖병, 한 손엔 기저귀가 덜렁 쥐여진 채 ‘던전’ 입구에 들어선 ‘쪼렙’ 용사가 된 심정이었다. 액체 괴물처럼 흘러내리는 뱃살을 한탄하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 시야에 남편의 움직임이라도 포착될라치면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부라리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꿈쩍만 하면 온갖 잔소리와 핍박이 쏟아지자 그도 잔뜩 날 선 채 모진 말로 응수했다. 밤잠을 못 이루며 허둥대는 나날이 계속되니 둘 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다. 모성 신화란 또 얼마나 허상이던가.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찬 내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친해지려 애쓰며 보살피는 일상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먼저 결혼한 사람이 단전 깊은 곳에서 우러난 듯한 한숨과 함께 “한번 살아봐라~”던 그 지경에 벌써 다다른 건가 싶어 아찔했다. 그런데 달라진 건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각자 알아서 잘하다 보면 적절한 균형점에 도달하기 수월했던 이전과는 달리, ‘각자’를 내려놓은 자리에 들어선 ‘부모’라는 타이틀의 무게에 짓눌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아내와 남편, 딸과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각자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애정으로 서로를 응원하다 보면 함께 산다는 게 그리 대단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이 된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새롭게 주어진 부모라는 역할 앞에서 ‘멘붕’에 빠진 우리는 새삼 완벽한 부모가 돼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자기도 못하면서 서로 완벽하길 바라며 닦달하다 아이 앞에서 패잔병처럼 쓰러질 게 자명했다. 조금 허술할지언정 따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행복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도 훨씬 나으리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누구누구의 부모라는 역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각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서로 사랑하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혼 전에도, 아이가 생기기 전에도 각자 잘해왔듯이, 그렇게.
 
영화 〈결혼 이야기〉에는 결혼 10년 차인 나와 비슷한 타임라인을 관통하는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의 ‘이혼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의 행복이 곧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니콜은 문득 그 결혼에 ‘자신만의’ 행복은 설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이혼을 선언한다. 나는 노아 바움벡이 왜 이 영화에 ‘이혼 이야기’ 대신 ‘결혼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알 것 같다. 무탈한 일상 가운데 별안간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도 알 것 같았고, 내 반쪽이라 여긴 사람의 성취가 내 행복과 별개임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도 알 것 같았다. “난 찰리가 꼭 안아주며 응원해 주길 바랐어요. ‘당신이 새로운 모험을 하게 돼서 기뻐. 당신만의 세계도 누리면 좋겠어.’ 그랬다면 이혼까지는 안 했겠죠.” 찰리가 니콜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한 다정한 남편, 자상한 아빠, 뛰어난 연출가라는 사실이 니콜의 행복을 담보할 순 없었다. 니콜이 영화 초반에 그걸 깨달아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결혼 이야기〉의 다양한 변주가 존재한다. 이혼까진 안 해도 행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상을 다들 그렇게 살겠거니, 결혼생활이란 게 원래 그렇겠거니,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낸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이자 심지어 고용인으로서도 자신만의 행복을 먼저 좇는 삶이란 이기적인 동시에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은 딸, 아내, 엄마가 상대인 가족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선사하기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우리는 부모 세대를 통해 학습해 왔다. 감정이라는 에너지는 부정적일수록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도 말이다. 부부가 각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양보는 하게 될지언정 어느 한쪽의 희생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에서 ‘희생’이라는 두 글자는 그 숭고한 빛을 잃었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의 희생은 서로의 행복을 갉아먹기 십상이다. 정서적인 채무관계는 결국 서로 원망하거나 탓하게 될 뿐이니까.
 
행복한 사람이 상대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다.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가 되기 위해 용쓰는 대신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니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다정한 말과 호탕한 웃음으로 아이와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주어를 남편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처럼 정신 상태가 곧잘 태도로 드러나 상대로 하여금 눈치 보게 만드는 감정적인 사람에게 확실히 효과적인 것 같다. SNS에 아이 사진을 도배하지도 않고 맘 내킬 때 훌쩍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나를 보며 후배들이 종종 말했다. 선배는 엄마 같지 않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며 짐짓 버럭 했지만, 나는 그게 악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상대가 행복하지 않으면 함께 일상의 버거움을 나눠지고 가는 나 또한 행복할 수 없다. 부부로서든 부모로서든, 각자 행복할 때 함께여도 행복하다. 나의 이런 주문이 당신에게도 유효하기를 기원한다. 
 
who is.
박지현 . 전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현 프리랜스 콘텐츠 디렉터 겸 백수 지망생. 여성의 사랑과 일과 삶에 관심이 많다. 아들(6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게 작은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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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박지현
  • 에디터 원세영
  • 사진 enillio garcia(unsplash)
  • 디자인 오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