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의 진짜 여자들 #ELLE 보이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오래도록 게임을 좋아한 SF 소설가가 말하는 게임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 그리고 그 놀라운 후폭풍


SF소설가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어쩐지 클리셰 같아서 쑥스럽지만,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발매 소식을 듣고 손꼽아 기다려온 게임도 있다. ‘아우터 월드(The Outer Worlds)’라는 게임으로, 원래도 SF 세계관의 게임을 즐기는 데다 먼저 공개된 영상이 마음에 들어서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출시 당일, 너무 궁금해서 ‘딱 한 시간만!’을 다짐하며 플레이스테이션을 켰다. 하늘을 가득 채운 거대한 행성의 아름다운 고리, 우주를 가로지르는 우주선이 차례로 나타났다. 보통 이런 게임들은 짧은 오프닝 영상을 보여준 다음에 플레이어가 조작할 캐릭터의 외형을 직접 고를 수 있게 해준다. 일단 성별은 여성으로 하고, 헤어스타일을 구경했다.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놀랐다. ‘어라, 긴 머리가 없네.’ 대부분의 헤어스타일은 짧은 머리였고, 긴 머리라고는 질끈 묶어 정수리 위로 동여맨 스타일뿐이었다.

내가 놀란 이유는 거의 대부분의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의 헤어스타일로 화려하고 긴 머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꾸미는 재미가 있어서 여성 캐릭터를 고른다는 플레이어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험난한 외계행성을 돌아다니며 괴물과 싸우고 총을 쏘아대는 캐릭터에게 치렁치렁한 머리는 방해만 될 게 분명하다. 플레이를 하다 보니 주인공 캐릭터 외의 여성 NPC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모두들 약속한 듯 편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 검색을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해외 게임 포럼에서 ‘아우터 월드’의 여성들이 못생겼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잔뜩 보였고, 국내 커뮤니티의 일부 유저들은 ‘페미니즘 냄새’가 난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게임 캐릭터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만으로 이런 반응이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아우터 월드’ 속 우주 곳곳에는 여성과 퀴어 캐릭터가 아주 많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그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도 않는다. 여성들은 당연하게 훌륭한 일을 해내고, 당연하게 같은 여성을 사랑한다. 그간의 많은 게임 디자인이 여성 캐릭터의 몸매를 어떻게 강조할지 골몰한 것 같았다면, ‘아우터 월드’는 인상 쓸 필요 없이 너무나 편안하게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우주였다.

게임 캐릭터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만으로 이런 반응이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는 내가 ‘여자애치고’ 게임을 좋아하는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알게 됐다. 실은 내 수많은 여자친구도 게임 중독에 빠져 살았으며, 심지어 일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게임 리서치 기업 뉴주(Newzoo)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게이머의 46%가 여성이라고 한다. 얼마 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고교 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약 100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울산여자고등학교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게임은 남성의 취미로 여겨졌다. 일단 여성 게이머들은 성별을 숨긴다. ‘여자니까 봐줄게’ 하는 치근덕거림에 질려 남성인 척 게임을 한다. 음성 채팅으로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드러냈다가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내러티브가 있는 비디오게임에서 여성이 공식 주인공인 게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임 속 여성들은 대부분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성적 대상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게임을 꼽을 때 늘 호명되는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는 독립적이고 강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비디오게임계의 ‘섹스 심벌’로 여겨졌다. 다른 게임의 남성 주인공들이 단지 모험가로만 여겨질 때 말이다. 국내 게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 게임업계 여성 창작자를 탄압한 2016년의 한 사태는 게임의 주류 소비자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묵살됐다. 그러나 여성 게이머 비율이 매우 높은 게임에서도 국내 운영진의 여성 혐오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게임은 지금 이곳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매력적인 매체이지만, 가상현실은 여전히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가능성을 본다. 국내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 ‘페이머즈’는 여성을 배제하는 게임 문화를 비판하며, 게임계의 여성 혐오를 고발하는 운동을 벌인다. 게임 문화도 전 세계적으로 차근차근 변해가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최근 작품 오프닝에 ‘이 가상 시나리오는 다양한 종교적 신념, 성적 지향성 및 성 정체성을 보유한 다문화 팀에 의해 기획, 제작되었습니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툼 레이더’는 섹스 심벌이었던 라라 크로프트를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로 재탄생시켰다. 게임 제작사들은 성적 대상화로 비판받아 온 여성 캐릭터들의 디자인을 수정해서 내놓는다.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의 카산드라, ‘매스 이펙트’의 여성 셰퍼드, ‘호라이즌 제로 던’의 에일로이처럼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들이 가상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여성 게이머들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온 결과다. 한국 게임계에서는 오늘도 페미니즘 이슈를 개인 SNS에 공유했다는 이유로 여성 창작자가 계약을 해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상세계의 여성들이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로, 성적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을 두고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며 불만을 표하는 게이머들도 있다. 그러나 시작된 변화는 바꿀 수 없다. 편협한 가상세계는 얼마 못 가 쇠퇴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 게이머들에게는 온전히 존중받으며 영웅이 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더디게 변화하는 현실 바깥의,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Writer 김초엽
93년생 소설가. 포항공과대학교 생화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면〉을 펴냈다. 따뜻하고 보편적인 서사의 SF를 쓰며 자신의 속도로 나아간다.

오래도록 게임을 좋아한 SF 소설가가 말하는 게임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 그리고 그 놀라운 후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