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엘르〉가 초대한 7명의 여성. 자기다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고, 멋진 창조물을 만들며, '나'를 완성해 가는, 멈추지 않는 여자들의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 네 번째, 우영미의 도전.

드디어 우영미의 옷을 여성도 입게 됐다. 파리 반응은 어떤가 ‘마담 우’가 선보이는 여성복이 어떨지 되게 궁금해하더라. 쇼장에 마련된 자리가 꽉 찼고, 리액션도 굉장히 좋았다. 판매는 아이텐티티가 좀 더 확고해진 뒤에 천천히 시작하려 했는데, 평소 거래하던 봉 마르셰, 프렝탕, 셀프리지 같은 백화점 바이어들이 보러 오고 싶어 했다. 우리 브랜드가 꽤 팬덤이 있다는 걸 느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에서 이번 컬렉션의 모티프를 얻었다고. 남녀 통합 컬렉션을 구상하며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한 남자가 수백 년을 살면서 여자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정말 근사하지 않나. 남성복 디자이너가 여성복을 만들 때, 여자를 굳이 ‘남자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여자 옷이라 해서 무조건 여성스러울 필요도 없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아니다. 여자든 남자든 약간 다른 보디를 가지고 있을 뿐이니, 그 다름을 미세하게 만져주기만 하면 된다. 그건 내가 너무 잘 안다. 평생 그렇게 남자 옷을 고쳐 입었으니까.
우영미 옷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일단 편견이 없어야 하고, 기본보디는 체격이 좀 있는 사람이 유리할 듯. 스스로 자신이 여성임을 강조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인드를 가진 여자.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성평등 이슈가 뜨거운데, 혹시 여성복을 선보이는 데 이런 흐름이 영향을 주기도 했나 나도 이 사회의 일원이니까, 어떤 형태로든 내게도 인풋이 있었을 것이다.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나만큼 남자의 삶을 이해하는 여자도 드물 것 같다. 여성의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대의 사람이기도 하고.
일찍이 앤드로지너스한 취향을 갖게 된 건 태생적으로 타고난 성향이 아주 여성스럽거나 귀여운 걸 좋아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성복을 선택했겠지. 30대 초반에는 머릿속에 완벽한 남성상을 떠올리며 디자인했는데, 그 또한 많이 너그러워졌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성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여자든 남자든 그냥 똑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디자이너로 살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은 물론 많았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그 시절 여자들이 다 아는 그런 일이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굉장히 바쁘고 힘들었다. 백화점에서 회사 대표들과 미팅하면 30명 중에 나 혼자 여자였다. 항상 나를 신기하게 보고 구경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자존심 상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So What?’ 그런 마인드였다고 할까.
출산 1주일 전, 의사진단서까지 받아 비행기를 타고 출장 갔다는 인터뷰를 봤다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딸도 어릴 때는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예를 들어 학예회에 왔네 안 왔네 그런 것들(웃음). 나중에 커서는 엄마가 일해서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고 하더라. 모든 인생에는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다.







과거 동생(고 우장희 전무)과 함께 브랜드를 일궜고, 현재는 딸 케이티 정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이런 협업이 중요했다고 보나 물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 아니, 좀 더 정확한 표현은 ‘같은 코드’를 가졌다는 것. 관점과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굉장한 시너지를 낸다.
2018년에 솔리드 옴므 30주년을 맞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때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은 내가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것.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에 안주하지 않고,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껍질을 깨고 진화했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2002년 무모한 용기로 파리에 진출했을 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촉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 수준 이하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개척해 온 길이 후배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한국 패션이 우영미라는 사람을 통해 해외에서 인정받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다.
예술과 건축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최근 눈에 담은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항상 아름다운 것을 많이 접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출장 가서도 일부러 매일 다른 호텔에 묵기도 한다. 지난가을에는 환갑을 맞아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베를린으로 바우하우스 100주년 전시를 보러 형제들을 모아 갔다. 기차 타고 데사우에 가서 온종일 밥 먹고, 걷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좋아한다. 사람 중심적이고 실용적인, 쓸데없는 걸 덧붙이지 않는 모던한 정신이 나랑 잘 통하는 것 같다.
디지털 시대의 빠른 변화를 좇는 데 어려움은 없나 솔직히 모든 게 다 낯설고 따라가기 힘들다. 내가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이해하려고 몹시 노력한다. 세상이 변하는 걸 막을 순 없으니 우리가 맞춰야 하지 않겠나. 기성복을 만드는 이상 소비자와 계속 접점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이런 얘기를 하면 요즘 사람들이 ‘라떼’ 찾는다고 하는 것 아닐지(웃음). 언뜻 세상이 엄청 달라진 것 같지만, 인간으로서 겪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 물론 보호막이 필요하고 숨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성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나면 모든 게 좀 더 쉬워진다. 나 역시 어릴 땐 잘 몰랐고, 지금도 헷갈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