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극장에 앉아 생각했다. 나는 오늘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애니메이션을, 토요일 오후에, 그것도 자막이 아닌 더빙 버전으로 보러 오다니. 그러니까 십수 년 전, 영화 <스튜어트 리틀>을 보러 갔던 오후, 나는 귀를 막지도 열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귀를 막으면 대사가 들리지 않았고 귀를 열면 어린이 관객들의 고함이 들렸다. 작은 생쥐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한 어린이들은 고양이가 나올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고 목청을 높여 생쥐를 응원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치고 싶은 건 나였다. 자신의 감정을 무방비로 드러내는 어린이들의 천진함을 품기에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어렸다. 육천 원짜리 관람료를 포기하기에 그때 난 너무 가난했고. 원망과 자책과 후회로 범벅된 마음을 억누르며 어찌어찌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작은 생쥐 주인공의 탐험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그 애의 빨간 스니커즈.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였다.

<스튜어트 리틀> 2000 @mbd.com
이후 기능성 농구화 컬렉션의 이름을 ‘CONS ERX 컬렉션’으로 변경하면서 척테일러 올스타 제품은 농구화 카탈로그에서 빠졌지만, 그 시절의 디자인 요소들, 이를테면 피벗 단추와 통풍을 위한 아일릿, 밑창을 감싸는 방식, 발목의 패치 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9년, 컨버스 논 스키드 농구화 광고 @컨버스 제공

1925년, 컨버스 올스타 농구화 광고 @컨버스 제공
영화 속에서 척 테일러를 신는 또 다른 부류는 바로 삶을 통제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젊음이다. 1985년 영화 <조찬 클럽>과 1983년 영화 <아웃사이더>의 소년들, 1995년 영화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짐 캐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2017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 등의 십 대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위태롭고 아름다웠다.

<바스켓볼 다이어리> 1995 Ⓒ imdb.com

<기묘한 이야기> 2016 Ⓒ imdb.com

<록키> 1976 Ⓒimdb.com
구글에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를 검색하면 이런 질문을 쉽게 볼 수 있다.
“Am I too old for chuck taylors?”
자신의 나이를 밝히며 척 테일러 올스타를 신어도 괜찮겠냐고 묻는 사람들. 그리고 20대까지는, 혹은 30대까지는 괜찮지 않겠냐고 답하는 사람들. 무용한 질문과 답변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컨버스를 즐겨 신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울리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이제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기며 시들어가지 않고, 안전해졌다고 확신하지 않고. 언제나 조금씩 방황하는 사람으로, 낡은 운동화를 신고서 낯선 문을 벌컥벌컥 여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