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별에도 예의라는 게 있다. 사실 성숙한 이별은 잔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 연애,이별,커플

  가끔 연애 그 자체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별이 있다. 때로는 마지막에 따라서 그 사람과의 추억이 재정의되기도 했고, 몇몇 이별은 사랑마저 퇴색시킬 정도로 힘이 셌다. 2년 반쯤 만난 첫 번째 남자친구와는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시한 이유로, 못해도 스무 번쯤은 헤어졌다. 그와의 연애보다 또렷하게 생각나는 건 마지막 이별 후 5년간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 생일, 기념일이면 어김없이 날아오던 ‘자니…?’와 같은 종류의 문자다. 이건 뭐, 구글 캘린더 알림만큼이나 정확했다. 또 다른 전 남친은 이별 후 뜬금없이 전화해 나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겼다며 “네가 망했으면 좋겠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원형탈모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고 싶다. 안 그래도 머리숱이 적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파이 마냥 자취를 감춘 이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내게 아름다웠던 연애의 기억이 아니라 ‘자니?’와 저주, 잠수 등의 악몽으로 남았다. 하지만 구남친의 끝판왕 격인 O에 비하면 이런 고만고만한 놈들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이별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 남자였다. O는 우리가 연애했던 시간만큼, 그러니까 헤어진 후 6개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온갖 폭언과 욕설이 가득 찬 메시지나 이메일은 기본, 새벽마다 전화를 걸었고, 차단하면 집(부모님과 함께 사는)으로 전화했으며, 전화기 코드를 뽑아놓으면 집 앞으로 찾아왔다. 내 방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질 않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가서 싸우다 보면 몇 번은 때리는 시늉을 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화가 나는 부분은 쌍시옷 가득한 메시지도 아니고, 코앞까지 올라왔던 그의 주먹도 아니다. “너는 이런 일을 당해도 싸. 내가 보고 싶다는데 만나주지 않잖아”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와 당당한 태도였다. 그게 분에 못 이겨 튀어나온 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그렇게 믿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참담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마지막까지 캐릭터에 충실했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의 전화 한 통에 겁을 먹은 건지,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 찌질한 놈.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이별은 이렇게 힘들다. 감정의 밀도나 종류는 다를지 몰라도 이별을 고하는 쪽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변명을 찾고 망설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코미디언 대니얼 슬로스의 관계와 이별에 대한 불편한 지적처럼 말이다. “누구나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가 있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더는 사랑하지 않는 거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상대방에게 가서 헤어지자고 할 이유는 절대 안 될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소시오패스 같으니까.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게 없고, 상처 주고 싶지 않고, 여전히 상대방에게 애정이 있고, 그래서 좀 더 함께하기로 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죠. 스포일러 주의! 그럴 일은 없어요. 그런 감정은 이미 죽어버렸죠.”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오죽하면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T. S. 엘리엇은 타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사무 변호사에게 편지 대필을 의뢰하는 방식으로 아내에게 별거를 알렸다. 영국에 돌아온 후에도 숨어 다니면서 불편한 만남을 회피했다(아, 비겁한 놈). T. S. 엘리엇 정도는 아닐지라도 솔직히 고백하면 나 역시 그냥 기다려본 적 있다. 상대방이 뭔가 용서 못할 짓을 저지르기를, 헤어짐의 순간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기를,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당당하게 헤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떻게 한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사람에게 이젠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다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나? 바꿔놓고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직격탄은 듣고 싶지 않다면서 스스로 합리화하곤 했다. 사실 이런 건 경험치가 쌓이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는 문제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은 사랑 같은 예민한 단어를 꺼내지 않고도 핵심을 전달하는 기술과 반대로 누군가 내게 그런 식으로 이별을 고해왔을 때 맥락만으로도 요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습득하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내 문제임을 분명히 하는 게 중요하다. 어쩌면 <제인 에어>의 작가 샬럿 브론테가 절친한 친구의 오빠에게 보낸 청혼 거절 편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청혼에 대한 저의 대답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거절이어야 마땅합니다. 당신과의 결합에 대해 개인적인 혐오감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확신컨대 제 성격은 당신 같은 남자에게 행복을 안겨주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진중하고 근엄하고 냉철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물론 이별을 통보받는 쪽의 경우는 상처의 온도가 다르다. 어찌나 극한 고통인지 연애의 금단은 중독자가 코카인 또는 아편과 같은 약물을 끊을 때 두뇌에 활성화되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작용시키고, 혼자라는 괴로움과 외로움은 IQ, 특히 논리와 추론 기능을 일시적으로 낮아지게 만든다는 뇌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연 후에 미친 짓을 하는 데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는 거다. 언젠가 한번은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부터 남자친구의 변심을 고발하는 내용의 캡처 메시지를 전달받은 적 있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들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과 ‘최대한 널리 알릴 것’이라는 지령을 읽고 나자 나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겠다 싶으면서도(그럴 배짱이 없다) ‘오죽하면’이란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그런가 하면 집요하게 취재하고 섭외하는 스타일로 유명한 후배 A는 이별에서도 업무적인 근성을 발휘했다. 20번 연속으로 부재중 전화를 남기고, 가끔 발신번호표시 금지 기능을 활용하는 융통성을 보였으며, “잘 지내?” “왜 답이 없어?” “우리가 겨우 이 정도였어?” 같은 문자를 계속 전송했다고 한다. 집착의 이유는 간단했다. “소셜 미디어 계정이 하나도 없는 남자라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 궁금해요? 잘 지내고 있는지, 다른 여자 만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녀의 일방적인 근황 체크는 2년 반 정도 이어졌다(덧붙이자면 그녀는 평소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쿨한 척했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내 최악의 이별은 O가 아니다. 인정사정없이 푹 빠졌던 남자 S와의 이별 후 난 처음으로 삶의 한 부분이 잘려나간 것 같은 고통을 맛봤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고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내 안의 스토커 근성을 발견했다. 밤이면 밤마다 그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염탐했고, 괜히 그의 집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제 술에 취해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는 쪽은 나였다. 그는 내 연락을 차단하지는 않았지만 간단명료한 대답으로 확실히 선을 그었다. 먼저 연락하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 독한 놈. 사실 우리가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 이유는 하나다. 아마도 이런 비극적인 모습에 사랑했던 그 사람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진짜 비극은 그 생각이 불러일으키는 광기 어린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결코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심리학자 가이 윈치는 테드(TED) 토크 ‘실연을 극복하는 법(How to fix a broken heart)’ 강연에서 실연 극복은 여정이 아니라 투쟁에 가깝다고 말했다. “실연은 조작의 고단수입니다. 실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과는 정반대의 행동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헤어짐에 대한 어떤 설명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이 말한 이유를 받아들이거나 스스로 지어내보세요. 기꺼이 관계를 놓아주십시오. 끝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헛된 희망에 기대고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희망은 믿기 힘들 정도로 실연에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어쩌면 가장 올바른 이별의 자세는 희망을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을 때, 수치스러움에 이불을 발로 차는 건 결국 당신일 테니까 말이다. 해봐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