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이야기들은 대개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모험과 환상의 세계 속에서 소년들은 성장하고 성인 남성은 영웅으로 활약한다. <해리 포터>의 해리는 호그와트로 떠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과 맞선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에드는 실패한 연금술로 잃어버린 몸을 되찾기 위해 현자의 돌을 찾는 여행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닥터 후>의 닥터는 지구와 우주,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공간 모험을 한다. 물론 그 모험 속에서 나는 내가 이입할 만한 멋진 여성을 항상 찾아내곤 했다. 헤르미온느와 윈리, 로즈는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유능하고 뛰어난 조력자로서 주인공을 위기로부터 구출해 낸다. 나는 그 여성 인물들을 정말 좋아했다. 꿈속에서 나는 모험하는 소녀였고, 조력자의 모습을 한 채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때도 언뜻 느껴지던 미묘한 소외감을 분명히 기억한다. 현실로 돌아오면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오토메일 정비사’ ‘로즈 후’ 같은 제목은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자였다. 진짜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작품 제목을 가지는 법이니까.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출간한 이후 나는 인터뷰도 하고, 리뷰도 읽고, 북 토크도 다녔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하나 있다. “주인공의 대부분을 여성으로 하신 이유가 있나요?” 그때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험과 사건의 중심에 남성 인물을 놓았던, 내 초기 습작들을 떠올렸다. 부끄럽지만 내가 그렇게 남자 이야기를 많이 쓰는 줄 몰랐다. 한창 소설 습작을 할 때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에 주목하자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받았던 충격이 떠오른다. 나는 여성인데, 왜 내 소설의 주인공은 남성일까? 왜 나는 헤르미온느와 윈리와 로즈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지 않는가? 그 이후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기본형을 여성으로 잡아야겠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나중에 SF를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책을 더 찾아 읽으면서 SF라는 장르에는 특히 훌륭한 여성 작가와 훌륭한 여성 서사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슐러 르 귄, 옥타비아 버틀러, 코니 윌리스, 낸시 크레스, 듀나, 김보영, 정소연…. SF는 어떤 공고한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여성 작가들이 최전선에 서서 그 한계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평을 끊임없이 확장해 온 장르였다. 그리고 나는 곧 여성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됐다. 모험하고 저항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애써 이입할 현명하고 지혜로운 조연을 찾을 필요가 없다. 여성 서사를 읽으라고 말해 준 사람들 덕에 나는 소년들의 모험담에서 느꼈던 소외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런 다음에야 환상 속에서조차 그들의 동료 중 한 명의 소녀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나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었다. 이제 텍스트 바깥 가상세계의 모든 곳에서 변화의 흐름이 느껴진다. 우주는 여성들의 공간이다. 세계적인 SF 시리즈 <스타트렉>, <스타워즈>, <닥터 후>의 최근 작품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SF와 판타지 관련 세계적인 상들도 여성 작가들이 휩쓴다. 그들은 여성 이야기를 쓰거나, 아예 성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를 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나아가는 시대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는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언젠가는 쓰레기통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두려움보다 나는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모험하는 소년의 이야기보다 모험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를 더 두근거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김초엽 1993년생 소설가.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펴냈다. 따뜻하고 보편적인 서사의 SF를 쓴다.
* '엘르 보이스'는 지금을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입니다.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