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이라는 사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작가이자 운동애호가 '황선우'가 바라보는 요즘 세상. | 여성,수영,수영장,페미니즘,황선우

  모든 것은 퇴사에서 시작됐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오랫동안 갖고 있었지만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도저히 규칙적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은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하는 거라지만, 아직 시작도 못 해본 뭔가를 좋아하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영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던 관문은 등록이다. 기존 수강생의 재등록을 먼저 받은 다음, 남은 인원만큼 신규 수강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문화센터 로비에 앉아 아침 일찍 대기표를 나눠 받고 순서를 기다리던 4월 말의 어느 날, 드디어 저녁반 등록에 성공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근사한 팔의 궤적을 그리며 멋지게 접영하는 사람이 되는 것!  수영을 배운다고 하자 주변 사람의 반응은 비슷했다. “살 빼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이 지방층을 더 두껍게 만든다는데? 여자 수영 강사들 몸매 보면 체격 좋잖아.” “수영장 물이 그렇게 더럽다며? 난 그거 생각하면 도저히 못 들어가. 머릿결이랑 피부도 망가지고.” 물안경 너머로 누군가의 발톱에서 떨어져나간 젤 네일을 발견하거나 늦은 밤에 격렬한 허기를 느끼며 든든한 식사를 해치울 때마다 문득 친구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몸을 움직일 때의 감각과 즐거움, 뭔가 할 수 있다는 재미와 성취감보다 오직 그 결과로 나오는 외모에 대한 계산 또는 걱정이 앞선다는 것이 말이다. 마치 유체이탈을 해서 운동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겹 더  존재하는 것처럼.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닐 때처럼 불편한 때가 있다. 패션 매거진이나 TV 음악방송에서 젊고 빛나는 몸들이 세상의 표준처럼 여겨질 때가 그렇다. 하지만 수영장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몸과 만나니 그것만으로도 좀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수영장이라는 세계에 있다 보면 몸이 울퉁불퉁하거나 각이 져 있고, 주름지고 불균형한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누군가는 상체가, 누군가는 하체가 한참 더 크며, 살이 찐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 어떤 남자들은 젖가슴이 늘어진 채로 상반신을 드러내고, 어떤 여자들은 거의 편평하게 납작한데도 조심스럽게 패드를 착용한다. 수영복만 입은 남녀의 몸을 오래 보다 보면 두 성별 사이의 체형 차이보다 개인차가 더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확연하게 남녀를 나누는 건 털이다. 여성은 드러나는 부위 어디에도 터럭 한 올 없이 매끈하게 관리하는데, 남자들은 무심하게 겨드랑이와 가슴 한가운데, 젖꼭지 주변, 발가락 위, 팔다리의 무성한 털을 내놓고 다닌다. 몸의 털이 흉하고 야만적이라면 왜 한쪽 성별만 열심히 제모하는 걸까. 나는 가끔 다리털을 밀지 않은 채 수영장에 가는 것으로 소심한 반항을 감행한다. 수영장은 일상에서 내가 타인에게 가장 많이 몸을 드러내는 공간인 데도, 아이러니하게 가장 내 몸매에 신경 쓰지 않는 곳이 돼갔다. 깨끗하게 땀을 씻어낸 다음, 물에 몸을 띄울 때면 내가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은 완전히 사라진다. 저마다 다른 내 몸과 타인의 몸을 완전히 감싸주고 그 안에서 움직이도록 허락했기 때문일까. 물은 분명 차가운데 이상하게 포근했다. 배가 나오고 통통한 할머니가 최소한의 몸짓으로 호흡하며 자유형 동작을 하는 걸 볼 때마다 내가 둔하다거나 날렵하다는 말을 얼마나 관습적으로 써왔는지 반성했다. 수영장은 육지의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붙들려 살아가던 ‘시선’이라는 중력을 신기한 방식으로 거슬렀다.     ‘내 운동’이라 믿으며 오래도록 해온 건 달리기였다. 러닝화 한 켤레와 운동복이면 충분하고, 언제 어디서든 혼자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 그런데 발가락을 담그고 보니 수영은 달리기와 반대 지점에 있었다. 일단 말리부의 개인 저택에 딸린 수영장을 가진 부자는 아니니까 집 근처의 수영장까지 찾아가야 한다.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세면도구와 수건 중에서 하나라도 빠뜨리면 곤란해진다. 정해진 시간과 이용 규칙을 지키며 안전요원, 강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내 일정이나 기분에 따라 두 시간을 달릴 수도, 10분만 뛰고 멈춰 돌아올 수도 있는 러닝과는 달리 수영은 꼬박꼬박 일정한 시간을 도려낸 듯 가져간다.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운동이 시작된다는 건 달리기가 가진 훌륭한 미덕이다. 반면 수영은 50분이라는 수업시간 전에 가서 몸을 씻는 데 이미 50분이 소요되며, 마치고 나서 다시 씻고 머리를 말린 뒤 집에 돌아오면 1시간이 더 흘러가 있다. 뛰면서 넓은 공원이나 한강 변을 독차지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수영을 하면서는 언제나 시설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구 밀도를 견뎌야 하고, 공간을 나눠 쓰는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 한번은 꽤 일찍 도착해 샤워 준비를 마쳤기에 쉬는 시간 동안 미리 연습이나 하려고 했더니 안전요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아직 앞 시간 수업을 마친 어린이들이 수영장에 남아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꼬마 회원들이 모두 샤워실로 이동할 때까지 계단에서 천천히 기다린다. 달리기가 자유이자 맨몸이고 혼자라면, 수영은 규율이자 복장이고 사회다. 수영을 시작한 지 석 달이 넘었지만 옆 레인에서 오리발을 단 상급자들이 지나가면서 ‘촤 촤’  뿌리는 물벼락은 여전히 초급반인 내 처지를 겸허하게 일깨운다. “저분들은 몇 달 배우신 거예요?”  강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1년 넘게 계속한 분들일 걸요?” 1년이라니, 수영장이라는 이 세계의 핵심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호흡과 발차기 말고도 인내와 성실함을 함께 배워야 할 것 같다.   황선우 작가, 운동애호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썼으며,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