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식객의 맛집 놀이 냉면에 얽힌 근대사의 비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한겨울 이 덜덜 부딪히며 차가운 한기로 추위를 이겼던 겨울 음식, 냉면이 이젠 여름이면 유명 냉면집 앞 긴 줄이 줄어들 줄 모르는 시절음식이 되었다. 헌데 왜 우리 주변에는 공장표 육수와 조미료 양념으로 맛을 낸 가짜 냉면이 판을 칠까. 난 진짜 냉면, 아들손자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은 진짜 냉면을 먹고 싶다.::냉면,엘라서울,엘르,엣진,elle.co.kr:: | ::냉면,엘라서울,엘르,엣진,elle.co.kr::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절절 끓는 아르궅(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의 시 중에서. 하루 세 끼 모두 같은 것으로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음식이 있다. 바로 냉면이다. 감히 이야기하건대 냉면은 단순 미학의 최고봉이다. 돌돌 말아 담은 면발 위에 편육 몇 점, 오이나 배 조각, 달걀 반 개 올린 것으로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는 이 소박한 메뉴에서 난 웅숭깊은 우리 음식의 매력을 절감하곤 한다. 백석이 '이 무슨, 이 반가운, 이 그지없는'으로 국수(지금의 평양냉면)의 미각과 정취를 노래했을 때 본 식객은 일어서서 그의 시를 낭독하고 또 낭독할 만큼 공감이 크다 하겠다. 왜냐고? Simple is Best. 단순한 것이 최고다라는 동서고금의 명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는 단순함 속에 감춰진 바다와 같은 깊고 넓은 맛을 한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인가. 파스타 만큼 간단한 요리가 없다고 하지만 것도 제대로 맛을 내려면 하루 온종일 닭육수 야채육수 우려 내야 하는 일이 기본이고, 면발에 들어가는 물과 소금 밀가루의 비율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이 난다 하겠다. 뿐인가. 삶는 예술이 또한 알덴테니 뭐시기니 하며 그 디테일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해 보일수록 맛의 결정적인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은 더 어렵다. 흔히 냉면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나누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무식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냉면은 차가운 면을 일컫는 말이니 시대와 국경을 막론하고 차갑게 먹는 누들이 어디 한 둘인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가르는 확실한 변별지점은 육수가 있냐 없냐, 혹은 매운 양념이 들어갔냐 안들어갔냐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면발에 있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을 나누는 결정적 차이가 피부색이 아니라 모발인 것처럼. 냉면은 메밀을 주재료로 하고 있으니 분류상 메밀국수, 소바 쪽 계열이라 하겠다. 함흥냉면은 감자전분을 주재료로 하고 있어 쫄면과 같은 계열이다. 여기서 다룰 것은 평양냉면. 솔직히 어렸을 때는 냉면하면 화끈하게 맵고 고무줄처럼 탄성 있는 함흥냉면이 떠올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냉면은 평양냉면이란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것은 설렁탕 국물이 시원하게 느껴지고 뜨거운 온탕에 들어갈 때 어 좋다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 순간과 거의 비슷한 듯하다. 기실 평양냉면은 맛을 내기가 쉽지 않은 음식임에는 분명하다. 메밀의 맛과 감촉을 살려내면서도 입안에서 툭툭 끊기는 정도를 조절하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육수의 깊은 맛을 내자면 오랜 노하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획일화할 수 없는 고유한 지점이 있어 내 입에 맞는다고 반드시 다른 사람의 입에도 맞으리란 보장도 없다. 평양냉면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은 그 멀건 국물을 수돗물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기며, 각자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맛의 기억에 따라 맛있고, 없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이것이 냉면이다'라고 판별하는 냉면의 원형은 상당 부분 근대의 것이라 할 수 있다. 1894년 에는 '겨울철에 무, 배추, 동치미 국물에 메일국수를 말아 돼지고기를 얹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냉면은 겨울철 절식으로 평안도가 최고'라는 문구가 보인다. 물론 그 이전 문헌에도 냉면 제조법이나 냉면에 대한 묘사가 발견되나 비교적 지금 우리가 먹는 냉면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설명은 19세기 문헌에서 발견되는 바이다. 이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심심한 겨울밤이면 야참으로 즐겨먹었다는 고종 냉면은 고기 육수에 편육, 배, 잣을 올려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냉면은 추운 겨울 살얼음 동동 뜬 육수에 면을 말아내 이를 덜덜 떨며 이한치한 죽기 살기로 먹었던 음식이다. 냉면을 여름에 먹게 된 것은 냉장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더불어 실향민 1세대가 서울 장안에 냉면집들을 내고 맛으로 그리움을 달래면서 냉면은 자장면과 더불어 최고의 외식메뉴로 각광받았다. 면틀에서 쭉쭉 내려오는 면발에 진한 조미료 범벅 양념 다대기를 턱 올려놓고 가위로 썩뚝썩뚝 잘라주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던 것. 냉면의 부흥시대는 화학조미료와 녹말(가타쿠리)의 번성과 궤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어렸을 적부터 불원천리 마다하지 않고 장안의 면옥을 드나드는 것은 물론 수시 때때로 집에서 냉면을 만들어먹던 식객의 입에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조미료 덩어리와 어느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모를 파는 육수로 만든 가짜 냉면은 음식 축에 끼지 못한다. 한우 중에서 양지와 사태 좋은 놈으로 골라 파 마늘 무 양파 통후추 넣고 잔잔한 불에 진하게 우린 육수를 차게 식혀서 냉장고 넣어놓고 한 나절. 무 편편 썰어 초절여놓고 달걀 삶아 놓고 우려낸 편육은 슴슴하게 양념해 얇게 썰어놓으면 고명 준비 끝. 시장에서 면만 사다가 뜨겁게 삶아 차가운 얼음물에 저린 손 참아가며 헹궈서 소쿠리에 건져놓으면 손님이 들이닥쳐도 오케이, 가족들 한 끼 만찬으로도 오케이. 만사 오케이인 음식이다. 여기에 살짝 재주를 부려 양파, 마늘을 갈아 고춧가루에 갖은 양념을 섞어 다대기를 마련해 놓으면 반쯤 국물과 함께 평양냉면을 즐기다가 양념 넣은 냉면을 즐기는 두 가지 맛을 즐기기도 한다. 헌데 요즘은 그 재미를 즐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육수와 고명은 아무리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면은 만들어 먹기 어려운 탓에 파는 면을 찾게 되는데 쉽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냉면 '면'이 조용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뭐 그 청수냉면 류의 '면'들의 질이 좋아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당최 이력을 알 수 없는 육수와 양념이 함께 포장된 대기업 제품들이 매대를 점령한 것이 못내 억울해서다. 왜 나는 냉면 하나 내 마음대로 만들어 먹기가 이렇게 어렵게 되었단 말인가. 고작 2인분 면에 한 바가지나 되는 필요 없는 육수가 딸려있어 비싼 값을 치르고 대기업 면들을 사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하곤 만다. 뭣하러 번거롭게 집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냐고? 장안의 소문난 면옥들 두고.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집에서 만든 냉면이 얼마나 맛이 있는데. 김치도 무조건 사먹고 냉면도 무조건 사먹다간 우리의 고유 음식이라고 했던 음식들의 원형이 공급자 위주로 변형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래옥, 을밀대, 필동면옥, 평양면옥, 필동면옥 등 장안에 유명 면옥집들.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맛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더 이상 이름 값 못하는 곳도 있고 2세대 3세대로 넘어갈수록 맛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익숙치 않은 맛에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찾는 곳도 있고 젊은 사람들 입맛에 조금씩 조미 맛을 더하는 곳도 있다. 어쩔건대? 온동네 냉면이 온통 가짜 냉면으로 들끓고 냉면의 원형은 문헌에서나 박물관에서나 보면 어쩔건대. 냉면을 사랑하는 식객은 그 생각에 오늘도 눈물이 난다. [Profile]이름: 낭만식객성별: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하는 양성성 소유자취미: 한 종목에 꽂히면 석 달 열흘간 한 놈만 팬다.특징: 사주팔자에 맛 미(味) 자가 있다고 용한 점쟁이가 일러줌과제: 어지러운 중원에 맛의 달인, 진정한 고수 찾기*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7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