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모든 존재와 지금 마주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요.” 모래 바람을 뚫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던 모습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지만 그는 깊이가 있되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요하되 상대방을 동요시키는 제이크 질렌할이 분명했다.
“복근 멋진데요.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뭘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요즘 어딜 가든지 제이크 질렌할에게 쏟아지는 질문들은 이런 식이다. 그가 동명의 인기 고전 게임을 스크린으로 부활시킨 영화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에서 탄력 있는 식스 팩과 넓은 어깨를 지닌 열혈 주인공으로 나선 탓이다. 거친 남성미를 폴폴 풍기는 굴곡진 몸매는 트레일러 영상과 포스터가 공개되면서 영화 개봉 전부터 뜨거운 화제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브로크백 마운틴>, <조디악>, <브라더스>에서처럼 온몸이 근육보다 감수성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해왔다. 재난 블록버스터 <투모로우>에 출연하긴 했지만 지구를 구하기엔 함량 미달인 ‘범생’ 역할에 가까웠다. 아무리 파파라치들에게 널따란 등빨이 적발되고 타블로이드지로부터 메트로 섹슈얼 스타라 명명됐어도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연기 내공 충만한 배우로 각인돼 온 게 사실이다. “남들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이번 캐릭터는 지금껏 연기했던 그 어떤 역할보다 저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사실 제게 왕자다운 면이 많거든요.” 캐나다 올드 몬트리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제이크 질렌할은 <굿 걸>에서 제니퍼 애니스턴이 늘 슬픔에 차 있다고 평했던 헤이즐넛 빛깔의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 눈을 다시 깜빡이기도 전에 자신의 대담한 발언에 아차 싶었는지 얼굴이 금세 발그레졌다. 각진 사각 턱이 주는 남성적인 이미지와 달리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내성적인 성격이 묻어 있는 제이크 질렌할은 영화에서 원작 게임의 주인공처럼 미친 듯이 뛰고 구르고 벽을 타며 원초적 액션을 연기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초강력 블록버스터들을 양산해온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자란 사실만으로 그가 겪었을 생고생이 눈에 선하다. 왕좌에 앉아 호위호식하는 왕자가 아니라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가 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그는 방탄조끼를 입고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았고 숨통을 조여오는 열기를 뿜어내는 모로코 사막에서 아슬아슬한 액션 신들을 직접 선보였다. “갖은 고초를 겪을 걸 알면서도 영화 출연을 수락한 건 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던 행복한 기억들 때문이에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미혼인 그의 입에서 나온 ‘아이들’이란 단어는 리즈 위더스푼의 어린 딸과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2007년 <렌디션>에서 함께 공연했던 리즈 위더스푼과 염문설을 뿌리더니 스타들의 이별과 배신이 난무하는 할리우드에서 소문난 잉꼬 커플로 군림했다. 이 모든 게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다. 무성한 결혼 소문을 뒤로하고 그들 역시 연인이 아닌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며 헤어졌다. 이미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리즈 위더스푼과 교제하는 동안 잠시나마 제이크 질렌할은 그녀가 배우 라이언 필립과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 노릇을 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인터뷰 전에 “그런 특별한 여인과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다는 건 참으로 축복받을 만한 사건이에요.”란 멘트로 선을 긋고 리즈 위더스푼과의 이별에 관해 질문을 받지도, 대답하지도 않겠다던 그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입맞춤을 했던 히스 레저에 관한 언급도 금기사항이었다). 그녀와 두 아이들이 떠나고 홀로 된 지금, 부성애 가득한 남자는 자신의 누나 매기 질렌할과 <자헤드-그들만의 전쟁>에서 동료 배우였던 피터 사스가드가 낳은 세 살배기 조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삼촌이 됐다. “올해 <크레이지 하트>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매기는 오스카 시상식 당일에 정신이 없었죠. 피터도 마찬가지였고요. 턱시도를 차려입은 전 그들 대신 어린 조카를 무릎에 앉혀 돌봐야했어요. 그 모습을 두고 매기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아버지가 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죠.” 제이크 질렌할과 세 살 터울인 매기 질렌할은 리즈 위더스푼만큼이나 늘상 그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여배우다. <다크 나이트>에서 박쥐 코스프레의 영웅으로부터 큐피트의 화살을 받았던 그녀 또한 어떤 영화에서든지 자타 공인 금빛 연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단한 노력이 있었겠지만 질렌할 남매의 연기 잘하는 비결을 그들 부모의 존재감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각본가 어머니 슬하에서 두 배우는 어린 시절부터 세트장을 놀이터 삼아 뛰놀고 배우로서의 ‘끼’를 다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이크 질렌할은 자신을 단거리 주자로, 매기 질렌할은 장거리 주자로 비교한다. “매기가 부모님의 관심을 받으며 오랫동안 진정한 프로 배우로 거듭났던 반면 전 연기에 매우 서툴렀어요. 그저 남들을 웃길 줄 아는 아이에 불과했었어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도 의문이 들었죠.” 이게 열한 살 때 오디션을 거쳐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사랑>으로 스크린 데뷔를 했던 연기 신동이 할 소린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사막 도시에서 흥미진진한 영웅 놀이를 마친 제이크 질렌할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러브 앤드 아더 드럭스> 촬영에 합류했다.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약회사의 추악한 비리에 맞서는 세일즈맨을 연기했다. 여기에는 가슴 뭉클한 러브스토리도 있다. 그의 상대역으로는 이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앤 해서웨이가 파키슨병을 앓고 있는 아티스트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많은 남자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남자인 척하는 법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이크는 달라요. 배역을 연기하면서 괜히 무게를 잡거나 과장하지 않고 캐릭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거든요. 이번 영화에서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증언대로라면 제이크 질렌할은 차기작에서 그동안 우리의 눈에 익숙했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게 분명하다. 매번 갈등과 상실감에 휩싸여 사색에 빠지고 고뇌하며 내면적으로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캐릭터로 말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는 자신들의 추잡하고 거친 부분을 차츰 알게 됐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촬영장의 모두가 그것을 공유했지요.”라는 제이크 질렌할의 말에서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금기의 경계에 서서 갈등하고 <조디악>에서는 미결 사건을 두고 무력함을 느끼며 <브라더스>에서 가족이란 이름이 의심과 반목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목도하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이런 추측을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가 인터뷰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는 말을 던졌다. “주변의 모든 존재와 지금 마주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요. 제가 문 밖을 걸어 나가다 불행히도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잖아요. 상대방이 그럴 수도 있고요.” 모래 바람을 뚫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던 모습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지만 그는 깊이가 있되 무미건조하지 않고 고요하되 상대방을 동요시키는 제이크 질렌할이 분명했다.
KEYWORDS ABOUT JAKE 영화 속 제이크 질렌할은 늘 점잖고 진중하다. 허나 실상은 다르다. 그의 색다른 모습을 관통하는 키워드. ●훌라훌라 엉덩이 댄스 영화 <자헤드-그들만의 전쟁>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막춤을 선보였던 제이크 질렌할. 영화를 위해 나체차림으로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고 엉덩이 두 쪽을 흔들면서도 산타클로스 모자로 자체 검열을 해주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내일의 록 스타를 꿈꾸며 1998년, 잠시나마 할리우드에서 ‘홀샷(Holeshot)’이란 이름의 록 밴드에서 활동을 했다. 그의 포지션은 보컬. 하지만 금세 밴드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밴드 드러머의 여자친구와 몰래 데이트를 하다 걸린 게 그 이유. 호되게 맞지 않은 게 다행이다. ●고음불가 드림걸즈 <브로크백 마운틴> 촬영 후 TV 버라이어티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한 그는 멋드러진 수트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스꽝스런 여장을 하고 엽기적 무대 매너로 <드림걸즈>를 흉내내기 시작, 제니퍼 허드슨의 ‘앤 아임 텔링 유(And I`m telling you)’를 열창했다. 곧 짐 캐리와 뮤지컬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그의 가창력을 확인할 수 있다. ●영웅놀이가 하고파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일명 ‘맨시리즈’가 쏟아져나오던 때, 제이크 질렌할의 이름은 상종가를 쳤다. 각종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른 것.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얼굴들이 가면을 썼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페르시아의 왕자로 한풀이를 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