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하드 보디의 시절이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80~90년대만 해도 크고 요란한 근육을 자랑하는 남성의 몸이 칭송받았다. 하지만 시대는 여러 번 변했고, 전통적인 남녀의 육체 이미지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됐다. 지금 대세는 마른 몸이다. 하얗고 연약하고 휘청거릴 만큼 가는 남성도 마른 몸의 여성만큼이나 미적 대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티모시 샬라메, 요즘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배우다. 감미로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부터 그레타 거윅이 연출을 맡은 화제작 <레이디 버드>, 서부극 <몬태나>까지, 지금 국내 극장가에 걸린 작품만 무려 세 편이다. 호들갑이 아니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티모시 샬라메에게 이래도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대놓고 영업하는 영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시선은 이탈리아 북부의 눈부신 여름과 고급스러운 별장 속을 유영하는 티모시 샬라메를 마치 홀린 듯 비춘다. 우리는 영화의 중반쯤에서 반나체로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그를 볼 수 있는데, 가늘고 허약해 보이는 그의 육체는 이 영화의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공놀이를 즐길 때 따분한 표정으로 살구를 따 먹고 책장을 넘기며 기타를 퉁긴다. 그는 나른하다 못해 권태로운 여름의 고양이처럼 화면 위를 어슬렁거린다. 함부로 손대면 망가질 것 같은 그의 앙상한 실루엣은 이 영화의 주된 관능이 된다.   물론 그의 몸이 여름 휴양지의 단순한 볼거리로 전시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주목하는 것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17세 소년 엘리오의 격렬한 내면이다. 엘리오는 이 낯선 감정 앞에 속수무책이다. 티모시 샬라메의 유약한 육체는 엘리오의 무른 감정, 즉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에 대한 일종의 환유다. 올리버 역을 맡은 아미 해머의 신체 조건과 비교해 보면 이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적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처음부터 올리버 역에 190cm가 넘는 배우를 원했다(믿기지 않겠지만 티모시 샬라메의 키는 180cm가 넘는다). 건장한 올리버와 낭창거리는 엘리오의 대비되는 몸. 그래서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압도당하는 이미지를 길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곧 영화의 무대가 된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끈 대목은 다음과 같다. 엘리오네 가문은 부르주아 엘리트다. 엘리오는 다독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올리버에게 “모르는 게 없다”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다. 현대의 지성은 이렇게 마른 몸을 하고 있는 걸까. <레이디 버드> 속 티모시 샬라메의 쓰임 또한 꽤 비슷해서 하는 소리다. 크리스틴(세어셔 로넌)이 첫눈에 반한 카일은 어느 정도 잘사는 집 아이고, 뮤지션이자 책을 끼고 사는 소년이다. 다만 엘리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카일의 외모가 조금 더 고스족처럼 파리하다. 21세기의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살이 찐 것을 게으름이나 자기 관리의 부재, 궁핍함 등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게으르기 짝이 없는 편견이지만, 기정사실인 양 고착화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라. 창의적이고 의식 있는 캐릭터에 뚱뚱한 배우를 기용하는 일은 드물다. 문학적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살이 찌면 지성인이 될 권리도 없다는 건가! <레이디 버드>에서 크리스틴의 첫 섹스를 망치고도 그런 세속적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태연히 책을 집어 드는 도도한 티모시 샬라메를 보면서 묘하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젊은 시절 잠시 청초했던 미소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였다. 만약 1995년에 제작된 영화 <토탈 이클립스>가 2020년에 리메이크된다면 랭보 역은 티모시 샬라메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늘 심기가 불편하고, 뇌쇄적인 천재 시인. 먹고사는 일이나 곁에 있는 여자친구를 달래는 것 말고 보다 고결한 욕망을 품은 형이상학적 인간. 마른 몸의 배우가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캐릭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티모시 샬라메의 사이에는 데인 드한이 존재한다. 데인 드한 또한 걸으면 팔다리가 허우적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뿐한 몸의 소유자다. 고집스러운 턱선과 날 선 콧날 그리고 영구적인 다크서클. 덕분에 그는 ‘퇴폐미 갑’이란 영예를 얻었다. <킬 유어 달링>에선 젊은 문학도들의 뮤즈이자 누구라도 한 번쯤 휘둘려보고 싶은 나쁜 남자로 등장할 정도다. 톰 히들스턴도 빼놓을 수 없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로키도 그렇지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는 해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창백한 뱀파이어가 되어 스크린을 누비기도 했다. 면이 아닌 선으로만 움직이는 것 같은, 위태롭고 치명적인 실루엣. 그러나 톰 히들스턴은 이와 절묘하게 대조되는 우아함도 장착하고 있다. <하이-라이즈>에 등장하는 닥터 랭. 호리호리한 몸에 빈틈없이 착 감긴 수트의 맵시에선 생활감의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다. 한마디로 기품 있는 몸이다. 에디터인 친구는 그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아무 음식이나 먹으면서 몸을 망치지 않고, 취미로 운동도 꾸준히 할 것 같고, 클래식한 아우라가 느껴져서 좋아.” 단순히 ‘보기에 좋았더라’가 아니라 몸 너머에 새겨진 기호까지도 아름다움의 한 축을 담당한다.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지인은 ‘미완의 느낌 때문에 마른 남자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한다. “어딘가 채워주고 싶지 않아?” 연민과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의미인데, 거기에 딱 부합하는 남자가 있다. 일본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카구치 겐타로다. 그의 팬인 한 영화감독은 마른 몸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를 ‘큰 강아지’ 같다고 표현한다. “너무 고와서 지켜주고 싶은데, 동시에 내가 기대도 될 것 같은 믿음직함과 다정함도 느껴져요.” 응? 이건 너무 역설적이잖아.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마른 몸을 선호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도 크고 살집이 어느 정도 두툼히 있는, 다시 말해 중량감이 느껴지는 육체에 매력을 느낀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면에 마른 몸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 예민한 느낌. 종잇장 같은 부피와 중력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 깃털 같은 무게감. 그러니까 가령 지드래곤이나 모델 최소라 같은 몸. 그 몸들이 자아내는 풍경의 홀연한 공기라는 것이 있다. 땀도 흘리지 않을 것 같고, 체취도 쉬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신비화된 육체. 성별을 초월한 중성적 존재. 이것은 마른 몸이 가진 일종의 신화적 이미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20년쯤 뒤에도 티모시 샬라메가 예민한 성격의 고등학교 문학 교사 역할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클럽에서 베이스를 치는, 안색이 좋지 않은 뮤지션이나. 그때는 꼭 지금처럼 섬세하게 마르지 않은 육체여도 좋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