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후 세 시. 온종일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화장실은 언제 갔다 왔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을 모두 마치려면 적어도 9시까진 모니터 앞에서 꼼짝 못할 상황. 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통이 밀려오는 듯하다. 아직 머리가 지끈거리진 않지만 조만간 두통이 올 게 뻔하다. 지레짐작이라도 손은 이미 책상 서랍을 향하고 있다.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쟁여둔 약들이 있으니까. 그중 ‘두통’이라고 큼직하게 쓰여진 진통제는 서너 개쯤. 사실 무얼 골라야 할지 잘 모른다. 그저 유통기한 한번 살피고 대충 끌리는 대로 털어 넣을 뿐. 잠시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거나 적당한 스트레칭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좀처럼 엉덩이를 떼기 어렵다. 생리통도 마찬가지다. 분명 약효가 떨어질 때가 되면 또 배가 슬슬 아파올 테니 네다섯 시간 간격으로 약을 집어삼킨다. ‘한국인의 ○○○’ ‘효과 빠른 ○○○’라는 광고 문구처럼 빨리 고통이 사라져 어지러운 삶이 제자리를 찾길 바라며…. 약에 의지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쉽고, 신속한 해결책 아닌가! 미국은 지난 10월 마약성 진통제(효과도 강하고 중독성도 강한!)인 오피오이드 남용 문제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15년에는 3만3000여 명, 2016년에는 6만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오피오이드 중독으로 다수가 목숨을 잃고 있는 것(오피오이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처방 없이는 구입할 수 없다. 하지만 만성 통증 등 통증이 심각한 환자에게 주로 처방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치통처럼 비마약성 진통제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경미한 통증에도 처방하는 사례가 많아 문제다). 이로 인한 사망이 미국인의 평균수명을 낮출 정도로 심각한 상황.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지 미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16년 호주의 ‘약물 관리 가계 조사(Drug Strategy Household Survey)’ 에 따르면 호주인 4명 중 3명꼴로 코데인(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을 남용했다고 한다. 다행히 호주에서도 올해 2월부터 일반의약품이었던 코데인을 처방 없이 살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했고, 국내 역시 처방 없이 구매할 수 없으나 어쨌든 전 세계적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처방 없이 구매할 수 있는 비마약성 진통제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우리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아주 극소량의 파라세타몰(타이레놀의 주성분. 국내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이라는 이름이 더욱 친숙하다.)이나 이부프로펜(애드빌, 이지엔6의 주성분)을 접하고, 자라면서 더 많은 양을 복용한다. 하지만 진통제는 말 그대로 통증을 잠시 경감시키기만 할 뿐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한다는 걸 쉽게 잊는다. 과학자들은 진통제의 효과를 두고 ‘몸속 통증 전달물질인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을 차단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증이나 발열, 부기 등 모든 염증 증상에 관여하는 프로스타글란딘은 고통을 주는 무언가가 몸속에 존재한다는 위험 상황을 뇌에 알린다. 진통제는 이를 억제해 뇌가 알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우리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개인의 대사 능력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동일한 양의 진통제를 먹더라도 누군가는 큰 효과를, 누군가는 미미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간에서 모르핀으로 전환되는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할 경우에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 대사 ‘능력자’라면 몸속에서 원활하게 전환된 모르핀 농도만큼 진통 효과도 월등하나 심하면 호흡곤란이나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대사 ‘무능력자’라면 모르핀이 활성화되지 않아 진통 효과 없이 중독적인 부작용만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리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 아랫배의 극심한 경련을 억지로 참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물론이다. 지금이 구석기시대도 아니고. 진통제를 무조건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해열진통제’와 ‘해열소염진통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요. 해열진통제인 타이레놀의 주성분, 다시 말해 파라세타몰은 위에 자극을 주지 않아 공복에 먹어도 안전해요. 하지만 해열소염진통제인 애드빌의 주성분 이부프로펜은 빈속에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위가 손상될 수 있죠.” 올바른 복용이 중요하다는 이혜원 약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생리통도 마찬가지! 평소 진통제 두 알을 먹는다면 진통제 한 알과 경련성 수축을 완화하는 진경제 한 알을 함께 먹는 것이 진통제로 인한 몸의 부담을 덜어내는 방법일 수 있죠.” 얼마 전 후두염으로 방문한 병원에서 한 번에 다섯 알, 즉 하루 15개의 약을 처방받았다. 약사에게 혹시 약을 덜어낼 방법이 없는지 묻자, 공복이 아닌 식후 섭취를 잘 지키면 위를 보호하는 약을 빼도 괜찮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은 아침에는 잠이 오는 약을 빼도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서너 시간 내리 컴퓨터 앞에서 일하면 누구라도 두통이 생길 걸요? 약부터 찾는 습관 대신 잠시 작업을 중단한 채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하는 등 습관을 바꿔보세요. 약처럼 빠른 효과를 보지는 못해도 분명 효과가 있을 테니.” 통증 전문가이자 호주 디킨 대학교의 의학부교수로 활동 중인 마이클 베그(Michael Vagg)는 명상 요법이 통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강조한다. 침술이나 물리치료로 두통이나 통증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것처럼. 효과를 보기까지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대체요법에 익숙해지면 약물에 마냥 의존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대형 마트나 편의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진통제. 별생각 없이 집어 드는 친숙함에 무뎌져 나도 모르는 새 지속적인 과용이나 남용을 하고 있지는 않나? 상처에 밴드를 너무 오래 붙이면 짓무르는 법. 일주일에 수차례 진통제를 집어 드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차라리 약사나 의사와 상담해 보길 바란다. 그냥 “두통약 주세요” 하지 말고. 몸의 정확한 상태와 평소 먹는 약의 종류와 양, 가짓수를 덜고자 하는 요구를 분명히 밝히는 거다. 약사와 충분히 대화하면 분명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대국민 홍보 구호가 그냥 생긴 게 아니다.진통제 없이 통증 다스리기1 커피를 한잔 마셔보자. 혈관이 이완될 때 두통이 더욱 심해지므로 카페인이 천연 혈관수축제 역할을 해 잠시나마 통증을 줄여줄 것이다. 2 찬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조깅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30분 이상 격렬하게 뛰거나 등산을 하는 것도 굿. 기분이 상쾌해지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상태가 되면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3 손바닥으로 피부를 감싸듯 살짝 대고 천천히 큰 원을 그리는 ‘엄마 손은 약손’을 실시할 것. 스킨십으로 분출되는 뇌 속의 마약, 엔도르핀이 스트레스와 불안, 통증을 해소해 줄 테니. 4 체리 주스를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 운동선수들의 염증과 관절염 환자의 통증을 개선했다는 연구 결과는 물론 불면증 개선 효과까지 있다. 라벤더, 페퍼민트처럼 코를 자극하는 에센셜 오일 향을 맡아보자. 매운 멘톨 껌을 씹을 때처럼 코가 뻥 뚫리며 뇌가 각성되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