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의 상징인 샤토 프롱트낙 호텔.
호화로움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호텔 로비.
캐나다 퀘벡까지 가는 여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3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캐나다 토론토. 예정대로 퀘벡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지만 공항에 발이 묶였다. 기상 악화로 인한 결항. 항공사 직원의 말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뉘앙스였다. 약사가 약을 처방하듯 그는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이틀을 기다렸다가 퀘벡행 비행기를 타거나, 당장 몬트리올로 날아간 다음 5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퀘벡에 가거나. 3시간 뒤, 나는 어둠 속에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고요를 무뚝뚝하게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섰다. 퀘벡이다. 듣던 대로 이곳에는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겨울이 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삭풍이 날을 세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몇 달간 먼지 섞인 겨울바람에 매섭게 시달렸던 탓에 되레 상쾌함이 치솟아 올랐다. 긴 여정에 끓어올랐던 마음도 함께 맑아졌다. 뽀얀 소리를 내는 눈 덮인 거리와 유럽 양식의 건물이 뒤섞인 풍경 위로 바람이 번졌다. 퀘벡은 북미에서 역사가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1608년 프랑스인이 처음 이주해 정착하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했다. 영국의 통치를 받은 시절도 있었지만 퀘벡은 프랑스의 유산과 옛 정취를 잃지 않았다. ‘작은 프랑스’라 불리는 이곳에선 열에 아홉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퀘벡 주의 깃발은 프랑스 왕가의 문양과 닮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는 수세기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캐나다지만 캐나다라는 사실을 잊게 하는 곳.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옹골차게 버티고 선 이국적인 도시는 길을 돌고 돌아 찾아올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리고 거대한 엄지처럼 솟아오른 고성풍의 샤토 프롱트낙(Chateau Frontenac) 호텔을 보고서야 이곳이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했다.
매해 1월마다 열리는 퀘벡 윈터 카니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슬라이드.
퀘벡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 ‘승리의 노트르담 교회’.
퀘벡을 여행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 상당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에펠탑을 보기 위해 파리에 가듯, 꽤 많은 사람들이 이 호텔 때문에 퀘벡을 찾는다. 도시의 어디를 걷든 눈에 들어오는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전 세계에서 아름다운 호텔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으며, 사진으로 가장 많이 찍힌 호텔로 회자된다. 사실 국내에서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도깨비성’이라는 한 단어면 설명이 충분하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가 소유한 호텔로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다. 하늘로 솟은 청동 지붕과 붉은 벽돌을 제복처럼 입은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125년째 붙박이 삶을 살고 있다. 한 세기가 넘도록 한자리에서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를 쌓아온 것이다. 그중에는 모나코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 호텔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영화 <나는 고백한다> 촬영지로 이곳을 선택한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등이 포함된다. 또 퀘벡 출신의 셀린 디온은 샤토 프롱트낙 호텔에서 공연 후 대형 음반사와 계약을 체결했고, ‘가장 섹시한 정치인’으로 언급되는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유년시절 아버지와 함께 묵곤 했다.
18층 규모로 600개가 넘는 객실을 갖춘 웅장한 스케일의 호텔에서 꼭 해야 할 것을 하나 꼽으라면 아침식사다. 탱탱한 아침 햇살이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세인트 로렌스 강과 레비 섬의 정경을 바라보며 첫 끼를 먹고 나면 그날 하루를 이미 풍족하게 채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대로 레비 섬에서 절벽 위의 샤토 프롱트낙 호텔과 수평선처럼 펼쳐진 구도심 성곽을 눈에 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레비 섬은 구시가지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면 10분도 안 돼 도착한다. 페리는 30분 간격으로 기운을 비축한 뒤, 유빙으로 뒤덮인 강을 느릿느릿 힘차게 헤엄쳐 간다. 육중한 뱃머리가 넘실거리는 유빙을 가로지를 때마다 부서진 얼음이 흘러나온다. 페리는 자정 무렵에도 운항해 야경을 감상하기에도 완벽하다. 퀘벡을 담은 사진들의 대부분이 밤을 배경으로 한 이유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은은한 조명들과 하나가 된 샤토 프롱트낙 호텔. 낮 동안 기품 있는 예술 작품 같던 호텔은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
샤토 프롱트낙 호텔 옆 뒤프랭 테라스 산책로.
퀘벡 인근에 위치한 북미 유일의 아이스호텔.
경험상 퀘벡은 도보로 구경하기 좋은 여행지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인간의 폭력성을 묵묵히 견뎌온 4.3km의 성벽은 어퍼 타운과 로어 타운,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길 안내를 돕는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중세 유럽 양식의 건물들이 녹아들어 있다. 샤토 프롱트낙 호텔이 올려다보이는 프티 샹플랭 거리는 <도깨비> 촬영지로도 친숙하다. 공유와 김고은이 공간이동을 하며 들락거리는 문과 김고은이 “저 시집갈게요. 아저씨한테”라고 외치는 장면에 등장했던 계단이 여기에 있다. 사실 이 계단은 그리 로맨틱한 장소는 아니다. 험난한 경사 탓에 넘어지는 사람이 많아 ‘목 부러지는 계단’으로 악명 높다. 가까이에는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용품을 판매하는 ‘부티크 노엘’이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김고은이 공유를 소환한 곳이다. <도깨비> 촬영지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번화가인 프티 샹플랭 거리의 일부다.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카페, 부티크, 기념품 가게들을 하나하나 곱씹어야 이 동네가 지닌 이야기를 오롯이 알 수 있다. <도깨비> 이전에 이곳은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촬영지로 유명했다. 프티 샹플랭 거리에 이웃한 플레이스 로열은 프랑스 초기 거주지로서 고단해 보일 만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승리의 노트르담 교회’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 눈썰미 좋은 영화 팬이 이곳을 여행한다면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톰 행크스에게 체포되는 장면에 등장한 이 뾰족 지붕의 교회를 떠올릴 거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그 장면의 배경은 프랑스의 몽사르였지만 정작 퀘벡에서 찍었다는 사실. 이로써 퀘벡이 프랑스보다 더 프랑스다운 곳이라는 명제가 증명된 셈이다.
눈과 얼음으로 지은 아이스 칵테일 바.
퀘벡 윈터 카니발의 시그너처인 얼음성.
고즈넉하고 정다운 풍경에 젖어들거나 오랜 역사의 향훈을 느끼는 것이 퀘벡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의 모든 행위는 절대 아니다. 이곳의 겨울은 다이내믹한 면도 갖췄다. 가깝게는 샤토 프롱트낙 호텔 옆에 설치된 ‘터보건(Toboggan)’이 있다. 100년을 훌쩍 넘은 슬라이드로 나무썰매를 타고 가파른 경사를 내려오면 최고시속이 70km에 달한다. 옛 방식대로 썰매는 직접 끌고 올라가야 하고, 헬멧과 안전벨트 대신 썰매와 연결된 긴 끈을 알아서 꽁꽁 동여매고 타야 한다. 준비 과정은 고되지만 바람보다 더 빠르게 허공을 가르고 나면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한다. 그래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타게 된다. 퀘벡 인근에서 개썰매를 타고 설원의 캔버스 위를 달리거나 30분 정도 떨어진 ‘빌리지 바캉스 발카르티에’ 리조트의 아이스 호텔을 방문하는 것도 퀘벡의 겨울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말은 꺼냈지만 아이스 호텔에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어도 어쩔 수 없이 추위에 압도된다. 퀘벡에서 맞이한 겨울의 하이라이트는 매해 1월부터 약 3주 가까이 펼쳐지는 ‘퀘벡 윈터 카니발’이다. 1950년대에 처음 시작해 세계 3대 겨울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윈터 카니발이 열리면 퀘벡은 휘황찬란해진다. 웅장하고 눈부신 얼음궁전이 들어서고 눈과 얼음으로 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곳곳에 마련된다. 성대한 겨울 축제가 시작되는 밤, 고즈넉한 정취에 가리워 있던 도시의 기운이 생동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현지인들이 모여 성대한 겨울 축제를 벌이며 퀘벡의 겨울을 뜨겁게 달궜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날 목덜미를 쥐어뜯던 칼날 같은 바람과 짙은 입김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이 웅크리거나 쭈뼛거리지 않았다. 퀘벡의 겨울을 만끽하는 법을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