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노는 법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현태준 작가는 취미가 곧 일이요, 일상이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좋아 장난감 수집가가 되었고, 만화를 즐겨보다 만화가가 되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 여행을 떠났고, 그 경험은 두 권의 여행 에세이가 되었다. 취미생활의 일상화, 일상의 취미생활화를 실천 중인 현태준 작가. 어느 오후, ‘서브 컬처의 사랑방’이라 불리는 그의 수집관을 불쑥 찾아가 보았다. |

‘뽈랄라’는 뽈랄라다‘뽈랄라’는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뜻하는 현태준 작가의 신조어. 남 눈치 더럽게 많이 보고, 이상한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한민국 사회에 똥침을 날리는 발칙함과 도발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코를 파고, ‘오덕후’라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어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주류에서 환대받지 못해도 나만 즐거우면 장땡이다. 이 시대의 진취적인 젊은이들과 음지의 오타쿠들을 위한 서브컬처의 사랑방, ‘뽈랄라 수집관’이 있으니까. 지난 4월 홍대 다보길에 문을 연 뽈라라 수집관은 ‘전방위 예술가’ 현태준의 수집 미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연희동 작업실과 파주 헤이리에 위치한 ‘20세기 소년소녀관’이 있지만, 개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수집품들을 한 데 모아 정리하고 분류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뽈랄라 수집관. 시대와 국가를 총망라하는 다양한 장난감들이 지하 수집관에서 바비 인형 마니아, 건프라 수집광, 그리고 어쩌다 얻어걸린 관람객들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영화보고 차 마시는 평범한 데이트에 싫증난 오래된 연인들이나, 어색함이 채 가시지 않은 ‘커플임박’ 남녀가 찾기에도 부담 없는 공간이다. “어머~이게 다 뭐지?”를 외치며 수줍은 공감대를 형성하다 보면, 어느새 한층 끈적한 사이로 발전할지도. (실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뻘줌함이 흐르는 몇몇 ‘커플임박’ 남녀들이 수집관을 방문했다.) 요즘 홍대에서 ‘핫 플레이스’로 손꼽히는 다보길에 수집관의 둥지를 튼 것은 단순히 임대료가 싸고, 마침 적당한 공간이 있어서였다. 홍대의 가로수길이라 불리는 다보길의 임대료가 싸다고? 선뜻 수긍이 가질 않는다. 현 작가의 말인즉슨, 1년 전에 계약을 할 때만해도 다보길 상권이 지금처럼 호황을 누리진 않았다고. “사실 홍대도 요즘 ‘맛탱이’가 많이 갔죠. 어딜 가도 술집이나 노래방, 클럽과 보세 옷집들이 대부분이에요. 문화를 느낄 만한 공간이 적어진 거죠. 하지만 전시도 하고 개인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홍대만큼 적당한 곳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상상마당 근처를 생각했는데 임대료가 너무 비싼 거예요. 그런데 마침 딱 맞는 곳이 다보길에 있길래 알음알음으로 계약을 했죠. 1년 전만해도 다보길이 지금처럼 이렇게 뜰 줄은 몰랐어요.” 비록 예전 같진 않지만, 홍대만큼 새로운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또 적절한 피드백을 뱉어내는 곳이 드물다는 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집관의 주요 타깃은 예상 외로 젊은 여성들. 방구석에서 프라모델 조립하는 마니아 삼촌들이 주요 고객일 줄 알았거늘, 의외의 사실이다. “요즘엔 개념 있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잖아요. 뭐든지 여자들을 타깃으로 해야 잘 돼요. 남자애들은 술, 여자, 게임, 군대 아니면 관심이 없으니까.(웃음)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건 여자들이 월등히 빠르죠. 수집관을 찾는 손님들을 봐도, 대부분 여자 손님이 남자친구 손을 잡고 들어와요. 남자애들은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봐도 별 감흥이 없고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여자애들은 훨씬 더 진취적이고 실험적이에요. 그래서 수집관도 좀 더 여성스럽게 꾸며보려구요. 어허허” 장난감은 유물이다 여행은 미식탐방이다흔히들 장난감을 수집한다고 하면 ‘피터팬 콤플렉스’나 손때 묻은 추억에 집착하는 오타쿠 정신을 떠올린다. 먼지가 앉을 새라 호호 불고 닿도록 닦아대는 무시무시한 집착은 옵션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수집이 곧 일상’인 현태준 작가는 수집의 달인답게 수집품 앞에서 언제나 ‘쏘 쿨’한 자세를 유지한다. “특별히 애착이 가거나 하는 물건은 없어요. 이제는 수집품을 대할 때 개인적인 감정이 없거든요.” 사이코패스처럼 감정이 없다니, 이건 대체 무슨 말? 혹시 장난감을 너무 질리도록 많이 봐서 그것에 대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애정의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에서 보는 것과 내가 보는 장난감의 의미는 좀 다르거든요. 미디어에서는 장난감을 너무 ‘추억’쪽으로만 몰고 가려는 경향이 있어요. 사적으로 보면 그것도 맞지만, 나는 이 장난감들을 1960~7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라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수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면 그것이 마치 ‘추억 따라 삼만 리’처럼 포장돼서, 장난감이 그저 추억의 물건으로만 기억되고 말아요. 장난감도 엄밀히 나와 관계를 맺어온 시대의 유물인데 말이죠.” 현 작가의 말을 듣고 보니, 귀엽고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을 딱딱한 유리 진열장 안에 진열해 놓은 것도 수긍이 간다.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박물관처럼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기능 또한 갖추고 싶었다고. 처음에는 소소한 취미에서 시작한 수집활동이었지만, 이제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게 된 셈이다. 현 작가의 이력을 되짚어 봄에 있어 ‘장난감’에 버금가는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행’. 현 작가는 만화가 이우일과 함께 2004년 를 펴냈으며, 지난해에는 단독으로 ‘현태준의 대만여행기’를 썼다. 요즘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는 대부분의 여행기가 감성 에세이를 표방하는 것에 비해, 는 알짜배기 생활정보와 배가 고플 때 보면 군침이 흐르다 못해 부아가 치미는 형형색색 맛 기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에펠탑 밑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친다거나, ‘테라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며 상념에 젖는’ 상투적인 문구는 사절.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 본 것들을 대상으로 한, 지극히 현태준스러운 감상을 접할 수 있다. “여행 정보가 하나도 없다고 ‘책 한 권 더 사야겠다!’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대만에서 2년 간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알짜배기 정보만 뽑아서 준 건데(웃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거예요. 우리 몸에서 혀만큼 감각적인 기관도 드물잖아요? 여행 가서 낯선 이성과 키스를 할 게 아니라면, 혀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감각적이고 황홀한 경험이 또 있겠냐구. 내 책을 보고 ‘이 인간은 먹는 거 밖에 모르는구만!’하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웃음) 아무튼 여행가서 먹는 거에 돈 아끼면 안돼요!” ‘태준체’라 불리는 일탈의 언어 잘 포장된 길을 걸을 때 안도감을 느끼고, 과자 부스러기 하나 없는 깨끗한 책상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각각의 챕터마다 달라지는 현 작가의 문체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정제된 문장을 구사하나 싶다가도 갑자기 술 취한 사람처럼 ‘~했어용’으로 문장을 끝맺고, 기존 언어와는 주파수가 다른 듯한 경이로운 신조어들이 페이지마다 판을 친다. “진지하게 써야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차등을 두는 편이에요. 딱히 신조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은 없는데, 말의 리듬에는 신경을 쓰죠. 좋아하시는 분들은 무릎을 탁 치는데, 정신없고 산만하다고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를 쓸 때 말의 리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출판사에서 그냥 ‘평범체’로 바꿔버려서 항의를 하기도 했죠.” 현 작가가 운영하는 공식홈페이지(www.hyeon.net)는, 책이나 인터뷰에서 백 퍼센트 담아내지 못한 ‘현태준표’ 말맛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똥차게 맛있는 주꾸미 구이를 ‘둘이 먹다가 한 놈 똥 누러 가서 빠졌으면 싶은 맛’이라 표현하거나 길에서 먹는 음식이 좋은 이유를 ‘천장이 하늘만큼 높고, 벽이 끊임없이 펼쳐져서’라 표현하는 그의 문장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간 사용해온 판에 박힌 비유들을 알집 파일로 압축해 휴지통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다. 어제 밤 몰래 시켜먹은 양념치킨과 얼큰하게 취한 거래처 사장님의 불콰한 얼굴도, 현 작가에게는 모두 살아 숨 쉬는 영감 덩어리인 셈이다. ...그리고 뽈랄라는 계속된다 장난감, 만화, 영화 포스터, 광고, 여행기, 동화, 수집관 운영, 개인전시회 개최 등등. 현태준 작가의 이력에서 그의 넓디넓은 오지랖이 ‘뻐렁치지’ 않은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콸콸 쏟아지는 취미생활의 폭포수를 지닌 그에게는 언제나 ‘다음 단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1인 잡지와 뽈랄라 상회, 그리고 뽈랄라 bar는 그가 생각하는 취미생활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1인 잡지는 꽤 알려진 출판사와 구두계약까지 마친 상태. ‘월간 뽈랄라’ 혹은 ‘계간 뽈랄라’를 만나볼 날도 머지않았다. “장난감, 만화, 사람, 음식, 술 등 내가 좋아하는 컨텐츠만 모아도 재밌는 잡지가 나오지 않겠어요? 많이 팔리진 않겠지만.(웃음)” 미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서 수입한 빈티지 상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 ‘뽈랄라 상회’는 9월 중으로 오픈할 예정. 음지의 유통망을 통해 근근이 수집활동을 이어온 마니아들에게 희소식이다. “연희동 작업실과 뽈랄라 수집관에서 월세가 이중으로 나가는 게 아까워서, 일단은 연희동 작업실을 ‘뽈랄라 상회’의 전초기지로 삼기로 했어요. 수입 빈티지 상품을 전문적으로 다뤄보려고요.” 마지막으로 ‘뽈랄라 bar’는 주변 사람들이 권유와 만류를 동시에 하고 있는 상황. “‘뽈랄라 bar'는 나보다 내 지인들이 더 난리예요. 솔직히 잘 될 거 같긴 한데, 나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술집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가게에서 맨날 퍼마시고 있음 어째. 실은 하나 봐두고 있는 곳이 있긴 한데, 일단은 포기 상태예요. 완벽한 포기는 아니고, 당분간 포기. 으하하!” 여러 개로 운영 중인 각종 홈페이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뽈랄라 닷컴’을 만들 계획도 있다. 무엇이든 뽈랄라스러운 것이라면 포털 사이트 뽈랄라 닷컴의 컨텐츠가 될 수 있다고. 전 방위를 아우르는 예술가이니만큼, 이곳저곳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그의 상상력과 호기심은 그 역치가 날로 커져가고 있다. 그가 ‘뽈랄라 월드’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은 이러하다. 그냥 남는 시간을 때우러 와도 좋고, 어깨를 들썩이며 아는 척을 해도 좋고, 전율을 느끼며 분수 같은 눈물을 뿜어도 좋다고.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대 환영이다. 없어선 안 될 식빵 끄트머리 같은 서브컬처의 사랑방지기, 현태준의 뽈랄라스러운 취미생활은 누가 뭐래도 길이길이 이어질 테니까.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10월호 NO.20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