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샤넬의 새들이 향하는 미래는 더 자유롭다

마티유 블라지는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여성의 삶에서 자유와 비상의 서사를 읽어냈다.

프로필 by 김유진 2026.10.28

그랑 팔레 천장엔 기러기 떼가 날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대한 유리 돔 아래 빛을 머금은 새들이 달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광경은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무대연출가 리샤르 페두치(Richard Peduzzi )가 나무 골조에 반투명 종이를 입혀 띄운 95마리의 새다. 새들은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아래 오묘한 색으로 물든 바닥에는 새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초현실적 풍경과 대비되는 것은 쇼의 첫 번째 룩. 모델 디아니라 후르부셔는 흰색 저지 드레스와 낡은 2.55 백을 들고 등장했다. 가슴에 코르사주 하나만 단 심플한 드레스와 얼핏 보이는 이너에서 가브리엘 샤넬이 컬렉션 초기에 선보인 언더웨어가 연상됐다. 군더더기 없는 룩과 이 오래된 가방은 83개의 룩이 펼쳐지는 장대한 쇼 내내 변하지 않는 하나의 단서였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 가브리엘이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시작한 것이다.


마티유 블라지가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첫 컬렉션을 선보인 지 꼭 1년. 그가 이어가고 있는 ‘라 콩베르사시옹(La Conversation)’의 세 번째 장은 ‘동전의 양면(Different Faces of the Same Coin)’이라는 제목 아래 가브리엘 샤넬의 여러 얼굴을 탐색했다. “여성은 살아가면서 여러 모습의 자신이 됩니다. 동전의 서로 다른 면처럼 말이죠.”


블라지의 말처럼 한 여성이 품은 수많은 자아, 시간이 흐르며 겹겹이 쌓이는 정체성이 이번 컬렉션의 출발점이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시대의 규범을 따르던 인물에서 그것을 뒤집은 혁명가로. 흥미로운 것은 블라지가 그녀의 일대기를 재현하는 대신 그 시절의 옷을 해체하고 뒤섞으며 오늘의 옷으로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가브리엘이 한때 입었던 옷과 훗날 벗어 던진 옷 그리고 그녀가 새롭게 만들어낸 옷이 한 컬렉션에서 공존했다.

샤넬의 전통적인 실루엣에 자유로운 감각을 더한 룩.

샤넬의 전통적인 실루엣에 자유로운 감각을 더한 룩.

컬러와 패턴, 디테일에 장식적 요소를 더했지만 여유롭고 편안한 착용감에 집중했다.

컬러와 패턴, 디테일에 장식적 요소를 더했지만 여유롭고 편안한 착용감에 집중했다.

로 웨이스트 스커트와 시스루 니트 톱, 프린지를 장식한 카디건, 트위드 재킷과 짧은 플리츠스커트 등 가브리엘의 상징적인 아이템들이 더 편안하고 여유롭지만 새로운 색과 장식, 어딘가 유쾌한 디테일들이 더해져 마티유 블라지의 언어로 표현됐다. 이어서 등장한 풍성한 튤 스커트엔 가브리엘이 젊은 시절 마주했던 에드워드 시대의 복식이 배어 있었다. 보디라인을 강조한 코르셋 톱과 여러 겹의 튤을 겹쳐 부풀린 드레스는 모델이 걸을 때마다 경쾌하게 출렁였다. 마티유 블라지의 코르셋은 여성의 몸을 옥죄던 과거의 역할이 아닌 취향과 선택의 영역에 있었다.


남성복의 문법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가장자리를 거칠게 마감한 질레(Gilet)와 코트, 넉넉한 팬츠와 날렵한 펜슬 스커트. 블랙 이브닝 수트까지 남자의 재킷과 셔츠를 빌려 입으며 여성복의 관습을 깨뜨렸던 가브리엘 샤넬의 태도를 녹여냈다. 다만 정교하게 재단한 어깨와 허리의 곡선은 유지하면서 옷을 입는 방식은 여유롭고 느슨하게.


마티유 블라지가 샤넬 수트를 티셔츠처럼 입는다는 것도 이해할 법하다. 격식을 갖춘 옷이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남성적인 테일러링과 여성적인 실루엣을 대립시키기보다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방식이다. 서로 상반된 요소를 과감하게 조합하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그가 이해하는 샤넬의 여성성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힘을 얻는다. 쇼가 고조되면서 강렬한 원색의 애니멀 프린트 그리고 1930년대 이브닝드레스에서 가져온 시퀸과 비즈가 가벼운 니트 위에서 나부꼈다.


원색적인 컬러와 애니멀 패턴을 적용한 액세서리.

원색적인 컬러와 애니멀 패턴을 적용한 액세서리.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한 장식을 다루는 방식. 이브닝드레스에나 어울릴 법한 비즈와 시퀸을 니트에 더하고, 바이어스 재단을 활용한 드레스는 티셔츠처럼 입을 수 있을 만큼 가뿐해 보였다. 장식적인 화려함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에 수반되는 불편함을 덜어낸 것이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옷보다 예상치 못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생동감이 새로운 샤넬을 정의하는 키워드다.


아침부터 황혼, 별이 뜬 밤까지 하늘의 변화를 그려낸 볼륨 드레스들은 압권이었다. 얇고 투명한 소재를 여러 겹 포개 구름처럼 표현하고, 공기를 머금도록 설계한 실루엣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정면에서 볼 때와 옆을 스쳐 지나갈 때의 볼륨감도 달랐다. 멈춰 있을 때보다 움직이는 순간 마음이 혹하는 디자인이었다.


특히 마치 폭죽이 터지고 은하수가 흩뿌려진 듯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등장했을 때는 그랑 팔레의 밤하늘이 런웨이로 내려온 듯 환상적이었다. 여기서 블라지가 보여준 것은 화려한 이브닝 웨어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었다. 몸을 따라 흐르고 걸음에 반응하는 소재의 움직임이야말로 이번 컬렉션이 이야기하는 자유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해 줬다. 머리 위의 새들은 주얼리와 버튼, 섬세한 자수 곳곳에 내려앉기도 했다. 특히 새장 모양의 미노디에르는 쇼의 메시지를 재치 있게 담아냈다. 새들이 이미 빠져나간 새장이라니. 가방 하나에도 이야기를 담아내는 특유의 유머가 엿보였다.


액세서리 역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시계 체인에서 착안한 잠금장치를 단 새로운 플랩 백, 구름 모양의 클러치 백과 익숙한 퀼팅 백까지. 오프닝에 등장한 가브리엘의 오래된 2.55 백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차이가 더욱 흥미롭다. 블랙과 화이트에서 벗어나 애니멀 패턴과 꽃 장식, 비즈 브로케이드 등 다채로운 프린트 믹스를 시도한 펌프스 행렬도 크루즈 컬렉션의 파격적인 샌들만큼이나 돋보였다.


이번 컬렉션의 절정은 새로운 트위드에서 드러났다. 견고한 실루엣을 유지하면서 움직임에 따라 늘어나고 유연하게 복원되는 ‘스모크드 트위드(Smocked Tweed)’를 개발해 스포츠웨어처럼 편안한 수트를 구현했다. 언뜻 보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샤넬의 트위드 수트지만 몸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트위드 특유의 조직감과 단정한 형태를 유지하지만 신축성은 높여 움직임이 훨씬 편해진 것. 오프닝의 얇은 저지 언더웨어와 트위드 수트가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겉모습은 다르


지만 두 옷 모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브리엘 샤넬이 여성복에 저지 소재를 도입하고 남성복의 실용성을 빌려왔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블라지는 단지 과거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가브리엘 샤넬이 평생 추구했던 자유 의지와 근본적 가치에 집중했다. 단추나 트위드처럼 눈에 보이는 상징보다 옷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이나 감각 같은 것 말이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하게 새로운 장식을 덧붙이기보다 그 옷이 처음 만들어진 이유를 되짚어 보고 지금의 방식으로 다시 답하려고 하는 노력.


 마티유 블라지는 다양한 샤넬의 여성상을 새로운 언어로 펼쳐냈다.

마티유 블라지는 다양한 샤넬의 여성상을 새로운 언어로 펼쳐냈다.

 여성복에 대한 관습을 깨뜨렸던 가브리엘 샤넬의 태도가 엿보이는 이브닝 웨어.

여성복에 대한 관습을 깨뜨렸던 가브리엘 샤넬의 태도가 엿보이는 이브닝 웨어.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Orlando>와 <등대로 To the Lighthouse>의 한 구절을 읽는 니콜 키드먼의 목소리에서 레슬리 고어의 ‘You don’t own me’, 생상스의 ‘백조(Le Cygne)’,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Gimme more’로 이어지는 사운드트랙 역시 시대와 정체성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사운드 디렉터 미셸 고베르(Michel Gaubert)가 고심해서 조율한 리스트로, 특히 성별과 세기를 가로질러 살아가는 인물을 그린 <올랜도>는 이번 컬렉션의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클래식 선율이 흐르던 런웨이에 느닷없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는 관객 누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프런트 로에 우아하게 앉아 있던 니콜 키드먼, 두아 리파, 페드로 파스칼 등 셀러브리티들도 모두 음악을 느끼고 어깨를 들썩였다. 근엄하게 과거를 기리는 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쇼. 샤넬의 역사를 다룬 컬렉션이 이토록 경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가브리엘 샤넬에게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는 도구였다. 블라지는 그 정신을 다시 작동시켰다. 샤넬의 유산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하는 방법이 반드시 과거의 샤넬을 닮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화려한 드레스나 신기술을 적용한 트위드가 아닌, 1년 전보다 한결 대담해진 블라지의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샤넬의 언어를 배우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랑 팔레의 새들이 향하던 곳은 가브리엘 샤넬이 떠나온 과거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샤넬의 미래다.

관련기사

Credit

  • 에디터 김유진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CHAN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