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이기심에 대하여

오늘은 미안하다는 말을 몇번 했어?

프로필 by 반휘은 2026.08.25

대도시가 그렇듯 뉴욕에 위치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수많은 대화를 가둔 어항 같다. 조용한 눈인사나 오래 못 본 소꿉친구와의 조우처럼 사람들은 달달거리는 고철 덩어리에서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일상을 나누기 마련이다. 11층에 사는 ‘제니스’도 그랬다.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사는 아들이 가족을 데리고 와 정신이 없었다던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을 때마다 목에 걸린 갈색과 옥색 비즈를 춤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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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를 처음 만난 건 부슬비가 내리던 저녁이었다. 100년 넘은 지하철의 케케묵은 먼지를 씻을 생각밖에 없었던 나는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저녁 보내”라며 함께 타고 있던 제니스를 두고 걸어 나왔다. 제니스가 9층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같은 층에 내린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같은 방향으로 몇 걸음 걷다가 우리는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옥색 비즈 아래 물결 모양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제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휘, 뭐가 미안해?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일엔 사과하지 않는 것도 배워야 해. 어차피 우리는 죽기 전까지 ‘Hello’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할 말이 ‘Sorry’일 테니까.”


사과의 미덕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겸손함을 보이기 위해, 진정성을 설득하기 위해,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옆으로 잠깐 비켜 달라고 해서 미안해. 나보다 너한테 가까이 있는 리모컨을 건네 달라고 해서 미안해. 내가 감히 소금빵을 자르거나 플레이리스트의 커버 사진을 고르느라 바쁜 네 옆에 앉아서 미안해. 신뢰와 애정으로 묶인 우리 사이에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며 속내를 마구 꺼내서 미안해. 아무튼 모든 게 다 미안해…. 수류탄처럼 던진 사과는 상대를 단상 위에 올림과 동시에 이런 날 해치지 말아 달라는 겁 많은 방어기제에 가깝다.


나는 그 방어기제가 꽤 세련된 껍데기를 쓴 걸 여러 차례 봤다. 본론보다 서론이 긴 이메일은 언제나 ‘혹시 가능하시다면’으로 물꼬를 트고, 두 번째 줄에선 한 차례 더 ‘바쁘시겠지만’이라며 화면 너머 미지의 일정까지 간곡히 염려한다. 용건 하나를 보내기 위해 몇 겹의 완충재로 문장을 싸맨다. 상대가 부담스러울까 봐,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하고 싶은 말의 앞뒤에 작은 에어백을 달다 보면 정작 충돌하지도 않았는데 말이 먼저 찌그러져 있다.


현대 사회는 다정함을 가장한 철조망으로 차려입은 곳이다. 알고 보니 모든 사람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이 세상이라는 상투적인 말처럼 우리는 어리숙함을 감춰야 하는 약점이자 언제든 내놓을 수 있는 무기로 여기며 모서리를 손질했다. 우리를 깎아내리는 것에 맞서라고 배우는 동시에 자신을 작게 만드는 법부터 익힌다. 손바닥만 한 티셔츠에 몸을 욱여넣고 목소리까지 접어야 하는 건 밀도 높은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 사람들은 불특정한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고 배워왔다. 가둔 주체가 불분명(갇히긴 한 걸까?)해도 우리는 배려와 평화라는 명목으로 존재감의 면적을 줄이고, 상대를 위해 정서적 피부를 도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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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을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따스함은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사과는 누군가의 상처를 알아차렸다는 표시다. 모든 관계는 상호 존중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나 역시 무례함을 솔직함으로 착각하는 사람보다 사소한 불편을 알아채는 사람 곁에 오래 있고 싶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언제부터 배려라는 핑계로 상대의 감정을 섣불리 판단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불쾌를 선제적으로 수습하는 노동이 되는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는 것과 내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를 민폐처럼 다루는 것은 꽤 다른 일임에도 나는 그리고 사회는 오랫동안 둘을 같은 예절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의 온도를 읽고, 어긋난 시선을 먼저 알아차리고, 자신의 요구를 요구처럼 들리지 않게 만드는 법은 오랫동안 여성에게 좋은 사회성의 일부로 권장됐다. 이제 디지털 공간은 그 오래된 기술에 더 많은 관객과 더 긴 기록을 붙인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만든 울타리에서 관객이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세우고 언어의 파장을 계산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오늘날의 자기검열이 새로 발명된 예절이라기보다 익숙한 생존술이 화면 속으로 옮겨온 것처럼 느껴진다.


뉴욕을 떠나기 전까지 제니스와 종종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목걸이를 흔들며 물었다. “오늘은 미안하다는 말 몇 번 했어?” 인사 대신 나누던 그 질문에 드디어 내가 자랑스럽게 “제로”라고 대답한 어느 토요일 오전. 그녀는 장바구니에 있던 동그란 쿠키를 내게 주며 웃었다. “축하해, 휘. 멋지게 살고 있네. 나도 누군가의 휘였던 적이 있거든. 이젠 너도 누군가의 제니스가 되면 돼.”


나는 여전히 사과를 많이 한다. 이메일 끝에 죄송하다는 말을 붙이고, 식당에서 직원과 동시에 길을 비키다가 서로 웃으며 사과한다. 새벽에 뒤척거리다 옆에서 코를 골던 강아지가 깨면 미안하다며 배를 토닥이고, 화분에 물 주다 조금 엎질러진 흙이 무당벌레를 뒤덮으면 손가락으로 등을 살살 털어내며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토로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가끔은 사과의 형태를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아주 짧게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지금 잘못한 것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여기서 숨 쉬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리 양해받고 싶은 것인지.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자기 만족성의 핑계가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이로운 것이긴 한 건지. 이들을 구별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반휘은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