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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마음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마음

프로필 by 임현주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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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책 읽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부모 참여 활동 공지가 오면 슬쩍 남편에게 미루거나 다음 기회를 엿보자 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니 문득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는 열흘 전부터 계속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아이 책장을 뒤적거렸다. 방송 대본을 리허설하듯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이미 아이에게 몇 번이고 읽어준 책이지만, 잘해내고 싶었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나는 일일 선생님 자격으로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았다. “아리아 엄마!” 아이들은 환영해 줬다. 나는 열정을 다해 책을 읽었다. 조금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읽다가 한 번 문장을 씹어 슬쩍 진땀이 나기도 했고, 예비 책까지 더해 세 권을 모두 읽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인사하고 일어서려 하는데 한 아이가 불쑥 다가와 안아줬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놀랐다. 이런 아이들 덕분에 선생님들이 일을 계속할 수 있구나 싶었다.


아마도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은 이런 것일 테다. 내가 좋아하는 존재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건 꽤 기적 같은 일이니까. 아이의 마음에는 조건이 없다. 나를 평가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다. 그저 반갑게 맞아준다. 그 포옹을 받고 나서 오래 생각했다.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 사람만이 그렇게 불쑥 안아줄 수 있다고. 그 가벼움이 오히려 더 깊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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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세계에서 호의는 좀 더 무거운 양상을 띤다. 누군가를 갑자기 안아주거나 ‘당신이 좋다’고 면전에서 말하는 일은 상대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대로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선물을 받을 때도 마냥 기쁘기보다 언젠가 되갚아야 할 부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부탁하는 일도, 기대는 일도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면 결국 관계는 조금씩 고립을 향해 나아간다.


어른의 세계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친절이 아니라 가벼운 친절일지도 모른다. 문을 잠깐 잡아주는 일, 지나가듯 건네는 칭찬, 아무 약속도 달지 않은 짧은 메시지 같은 것들. 횡단보도에서 아이에게 웃어주는 낯선 사람의 미소처럼 기억을 강요하지 않는 호의들. 반대로 부담이 되는 호의도 있다. 과한 선물과 공개적인 배려,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 언젠가 ‘내가 그때 해줬잖아’라는 말로 돌아오는 호의. 그 경계는 상대에게 얼마나 자유를 남겨줬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작은 호의라도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가 섞이기 마련이다. 알아주길 바라고, 기뻐해주길 바라고, 최소한 무시당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호의를 선물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반응이 있어야 완성되지만, 표현은 내가 하는 순간 이미 역할을 다한다고.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호의 건네기. 감정도, 시간도, 의미도 과하게 싣지 않은 작은 표현들. 그런 관계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면 왠지 조금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해준 포옹을 떠올린다. 아이들은 내가 무엇을 돌려줄지 묻지 않는다. 그냥 안아줬다. 그렇게 시작했던 관계들을 떠올려본다.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다시 내일을 기대하는 법> 등을 썼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임현주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