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끊자 무알콜성 생활이 가져다준 의외의 재미
우리에게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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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매사 호기심이 넘치고 활동적인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번에는 무엇을 시작해 볼까?’ 하며 거창한 궁리를 한다. 독서, 공부, 운동, 집필. 이런 종류의 목표들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설계하는 것으로도 흡족하다. 삶에 긍정적인 예언을 발동시키는 기분이 들어서다.
실제로 몇 년 동안 나는 꽤 어려운 과업을 여러 번 완수해 냈다. 한 달에 수십 권씩 책을 읽기도 하고, 헬스장 수련을 통해 여자 강호동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수능을 다시 칠 기세로 영단어를 외우거나 일하는 기계처럼 글만 쓴 적도 있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 힘듦이야말로 빛나는 생산성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성취가 쌓일수록 삶의 질이 바닥을 쳤다. 가장 큰 의문은 자기애의 고갈이었다. 나름 애쓰는 내 모습이 적어도 내게는 기특해 보여야 하건만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보다 기묘한 갈증이나 짜증스러움, 정체 모를 조급함에 압도되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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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중대한 두 가지 원인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보상심리 때문에 많은 술을 자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며 술까지 마시느라 밤잠을 거의 생략하고 있있었다. 어쩐지 단기간에 놀랄 만큼 못생겨졌다 싶더니 쉴 새 없이 퍼붓는 알코올 공격에 외모가 항복해 버린 모양새다. 그제야 열정인 줄 알았던 비정상적 에너지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것은 자아실현 의지가 아니라, 양심의 가책 없이 부어라 마셔라 취하고 싶은 욕망일 뿐이었다. 명분 없이 술만 푸면 슬픈 알코올 중독이지만, 고생 끝에 마시면 당당한 축하주가 됐다. 내 진취적 목표들은 결국 술을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한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깨달음은 참으로 민망했다. 숙연한 심정으로 그동안의 방정맞은 생활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돌이켜보니 어떻게 노력하고 있다는 착각이 가능했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엉망인 나날이었다. 나는 술에도 취하고, 자기계발 중이란 고양감에도 한껏 취해서 가장 중요한 일상 감각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갓생’으로 가는 길이 실은 신(God)의 옆구리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니. 갑자기 인생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언감생심 남보다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품어본 적도 없다. 그저 남들만큼 평범하게, 평탄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 정도의 바람도 과분했다는 무력감이 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삶이라도 삶은 삶이니 살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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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란 사실에 차라리 감사하기로 했다. 나만 바뀌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낙관이 가능해서다. 최우선 과제는 당연히 술을 완전히 끊는 것이었다. 무알코올성 생활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갈망과 무료함이 따라붙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고통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괴로운 만큼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인간의 삶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훨씬 중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바로 그런 타입이라는 걸 지금이라도 깨달아 다행이었다.
금주 다짐 기간에는 술을 끊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독히 무미건조할 것 같았지만 취기가 가신 자리엔 금세 잃어버린 감각들이 차올랐다. 나는 술냄새에 가려졌던 초록의 향기, 항상 또렷하고 분명한 시야, 온전한 하루치 기억, 놀랍도록 개선된 수면의 질을 느끼며 순수하게 기뻐했다. 늘 거무죽죽하던 안색이 비로소 사람의 색으로 돌아왔을 때는 진심 스스로가 기특했다. 광란의 술 파티를 멈춘 후, 나는 좀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 재미없음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제는 새해가 되어도, 계절이 바뀌어도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너무 채찍질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때려가며 망가질 자격을 획득하는 가혹한 게임을 멈췄다. 요즘은 다만…. 그냥 산다. 그냥 산다는 것이 대충 산다는 뜻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하루, 심지어 내 자신조차 감동시킬 필요 없는 하루가 더없이 가뿐하다.
정지음
작가, 싫은 것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와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정지음
- 사진 unsplash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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