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요즘도 가냐고요? 방금 다녀왔어요 2탄
단골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 요즘도 가는 사람 있냐고? 지난가을 다녀오자마자 남기는 갓 쪄낸 호빵처럼 따끈한 간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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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내 투어, 포르투갈 해안 길
산티아고 순례길 하면 산이나 들판 같은 대자연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란 화살표는 종종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갈리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 비고(Vigo)를 지나는 포르투갈 해안 길(Camino Portugue′s de la Costa)이 대표적이다. “매일 20~30km씩 고행하듯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심신이 확 지치는 날이 와요. 그럴 땐 도시의 활기를 느끼며 하루쯤 숨을 고르는 게 도움이 되죠.” 가이드가 시장에서 산 싱싱한 생굴에 갈리시아 토착 화이트 품종인 알바리뇨(Albariño) 와인을 곁들이며 말했다. 산뜻한 산미가 감도는 와인을 홀짝이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욱신거리던 종아리 근육이 서서히 풀리면서 ‘순례’와 ‘여행’의 경계가 일순 모호해졌다.
폰테베드라 근교의 작은 해안 마을 콤바로(Combarro). 돌로 만든 곡물 저장고가 줄지어 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내에서 에너지를 재충전한 우리는 느슨해진 배낭을 고쳐 메고 ‘걷기 좋은 도시’로 알려진 폰테베드라(Pontevedra)로 걸음을 옮겼다. 중세의 붉은 석조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데다, 도심 대부분이 차량 없는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운영되고 있어 순례자들이 모처럼 부담을 내려놓고 산책하듯 통과하는 곳이다. 우리는 순례자의 수호 성모를 모신 산타 마리아 대성당(Basílica de Santa María la Mayor)과 지금까지 봐온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는 달리 소박한 분위기를 지닌 샌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을 차례로 돌아보며 중세의 짙은 음영을 간직한 항구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버스킹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자, 삼삼오오 모여든 순례자들이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뒤섞인 도시의 활기 속에서 그들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아치형 석교, 폰테마세이라.
폰테베드라 시내를 통과하는 순례자들.
가슴 벅찬 순례의 엔딩 크레디트, 피스테라-무시아 길 & 산티아고 대성당
몇몇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기 직전, 마지막 구간에서 방향을 틀어 피스테라-무시아 길(Camino Fisterra-Muxía)로 향한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아치형 석교가 연달아 이어지는 폰테마세이라(Ponte Maceira)와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대서양 끝자락 ‘피스테라(Fisterra)’의 장관을 보기 위해서다. 폰테마세이라에 도착하자 갈리시아 특유의 초록과 회색이 뒤섞인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순례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예요.” 며칠 사이 부쩍 가까워진 가이드가 작게 속삭였다. 일행과 나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석조 다리와 그 아래로 느릿하게 흐르는 이끼 낀 강물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근처 식당에서 마늘에 볶은 조개찜과 새우구이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피스테라로 이동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0km’라고 적힌 조가비 표지석이 해안가 입구에서 우리를 맞았다. 사실상 이곳이 순례길의 종착지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의 바다. 순례길의 공식 종착지는 산티아고 대성당이지만, 많은 순례자가 전통에 따라 대서양 끝자락인 피스테라까지 여정을 이어간다.
어디선가 성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다 쪽으로 걸어가자 높이 5m가 넘는 파도가 해안의 바위를 때리며 새하얀 포말을 분수처럼 쏘아 올리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런 바다는 처음이에요.” 일행 중 한 명인 여행 기자가 탄성을 내지르며 카메라를 들었다. 예전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완주를 기념하며 낡은 옷과 신발을 불태우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고. 마침내 당도한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순례자들이 배낭을 베개 삼아 삼삼오오 드러누워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거뭇거뭇해진 그들의 얼굴에서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복잡미묘한 환희가 엿보였다. 불과 일주일 남짓 순례길을 체험한 나도 이토록 벅찬데, 오랜 여정을 마친 그들의 감흥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하루 두 번 순례자 미사가 열리는 산티아고 대성당.
우리는 대성당 앞에서 30분쯤 줄을 선 끝에 하루에 두 번 열리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정오에 열리는 순례자 미사에서는 긴 줄에 향로를 매달아 분향하는 특별한 의식을 볼 수 있어요. 11세기에 순례자들의 악취를 없애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시작된 행사죠.” 가이드가 기대해도 좋다는 표정으로 귀띔했다. 하지만 말만 들어서는 어떤 광경일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미사가 시작되고, 곧이어 사제가 이날 도착한 순례자들의 국적과 출발 도시를 하나하나 낭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새로운 국가 이름이 나올 때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졌다. 순례자 중 한 명이 대표로 연단에 올라 감사 기도를 올릴 때는 ‘나이롱 신자’인 나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미사 끝 무렵, 드디어 가이드가 말하던 진풍경이 펼쳐졌다. 여덟 명의 사제가 천장에 매달린 줄을 동시에 잡아당기자, 수십 킬로그램짜리 대형 향로가 성당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뜻한 수지 향이 밴 연기가 성당의 공기를 휘저으며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듯 앞뒤로 그네를 타는 향로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신발 끈을 조이고,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에 반드시 도전해 보기로.
강보라
소설가.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티니안에서>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5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최근 저서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 있다.
Credit
- 글 강보라
- 사진 ©TurespaN~a / ©Axencia Turismo de Galicia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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