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요즘도 가냐고요? 방금 다녀왔어요 1탄
단골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 요즘도 가는 사람 있냐고? 지난가을 다녀오자마자 남기는 갓 쪄낸 호빵처럼 따끈한 간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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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참가자 중 한국인의 비율은 상위 10~11위에 이를 만큼 높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를 평생의 버킷리스트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랬다. 다만 일상의 관성에 떠밀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그 해상도가 살짝 흐릿해진 꿈이랄까. 젊은 시절 산티아고에 다녀온 인생 선배들의 뜨거운 ‘간증’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열정이 약간 식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국내에도 대안이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가서 ‘사서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고. 각설하고, 산티아고에 직접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산티아고는 ‘실물이 갑’이라는 것을.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으로 알려진 사모스 수도원.
딱딱한 등산화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압도적인 고독이 영혼을 통째로 흔든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어온 나의 내면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요동치고, 잊을 만하면 펼쳐지는 장엄한 풍경 앞에서 경외와 위안, 기쁨과 회한과 기타 등등의 감정이 널뛰듯 오르내린다. 그처럼 마음의 동요와 몸의 고행을 거듭한 끝에 산티아고 대성당과 마주하면 제아무리 냉소적인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 ‘내려놓음’의 희열이야 말로 매년 전 세계에서 20만 명에 가까운 순례자가 산티아고로 모여드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을 사이에 낮게 포복한 투이 대성당. 포르투갈에서 출발해 스페인에 입성한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랜드마크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의 '애착 키 링'인 조가비 장식품.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길은 스페인 북서부의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말하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갈리시아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두 발로 구석구석 감각하는 여정이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갈리시아지만, 습도가 낮고 선선한 가을은 그중에서도 순례자들에게 최적의 보행 시기로 꼽힌다. 약 800km에 이르는 순례길을 온전히 도보로 완주하는 데는 평균 35~40일이 소요된다. 일정상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도보와 버스를 번갈아 이용하며 여러 코스를 ‘찍먹하듯’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덕분에 순례길이 가진 서로 다른 표정과 매력을 날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몬테 산타 트레가 산 위에 늘어선 옛 켈트족의 석축 움막.
순례자들의 영원한 ‘최애’ 코스, 프랑스 길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라틴어로 ‘별이 빛나는 들판의 성 야고보’를 뜻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이하 산티아고)’는 말 그대로 별이 빛나는 밤에 성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9세기경 스페인 북서부에 자리한 이 땅에 그의 유해를 안치한 대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는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세계 3대 성지로 자리 잡았다.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은 큰 코스만 셈해도 어림잡아 열 개가 넘는다. 그중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 Pied-de-Port)에서 출발해 약 800km를 걷는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은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코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 중 절반 이상이 선택하는 인기 코스인 만큼 길이 잘 정비돼 있으며,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도 공립부터 사립까지 폭넓게 운영되고 있다.
순례자 여권 소지 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 숙박비는 하루에 6~10유로선.
첫 번째 주요 지점인 오 세브레이로(O’Cebreiro)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순례길다운’ 클래식한 풍경이 펼쳐진다. 배낭까지 덮는 커다란 우의를 걸치고 스틱을 짚은 순례자들이 안개를 가르며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란! 한국의 초가집을 닮은 밀짚지붕을 머리에 인 전통 가옥 팔로사(Palloza)에서는 벽난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식당들이 늘어선 거리에는 갈리시아 명물인 매콤한 문어 요리 냄새가 짙게 풍긴다. 기념품 가게 입구에는 성 야고보의 유해를 덮은 조개껍데기에서 유래한 가리비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초보 순례자인 나는 본격적인 여정에 앞서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갈리시아 관광청에서 파견된 현지 가이드가 내 배낭 앞주머니에 여권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숙소와 식당, 박물관 등 순례길의 여러 시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요. 순례자를 위한 특별 패스인 셈이죠.” 그의 말대로 순례자 여권은 마법의 할인 티켓인 동시에 순례자의 고된 여정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록장이기도 하다. 알베르게, 레스토랑, 미술관 등 순례길 곳곳에 비치된 스탬프를 그때그때 여권에 찍어둬야 훗날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국에서 공인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세브리오의 풍경.
산티아고로 향하는 표식인 노란 화살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6세기에 지어진 사모스 수도원(Monastery of Samos)이 불현듯 위용을 드러낸다. 중앙 파티오의 네레이드 분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 바로크 양식 건물부터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를 뽐내는 회랑까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최홍만처럼 웅장해지는 곳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스페인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20세기 중반 저수지 건설로 일부가 수몰됐다가 최근 재건된 포르토마린(Portomarín) 마을도 그중 하나다. “물속에 잠겨 있던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원래 자리로 옮기는 식으로 마을의 역사적 건축물을 모두 복원했죠.” 그 많은 돌을 사람이 직접 옮겼다고? 가이드의 설명에 반신반의했으나 웬걸, 실제로 마을을 걷는 동안 숫자가 새겨진 돌로 쌓은 건축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순례길다운' 풍경을 간직한 프랑스 길의 작은 산악 마을, 오 세브레이로.
갈리시아 명물인 매콤한 문어요리.
눈 깜짝할 새에 국경을 넘는 즐거움, 포르투갈 길
“오늘은 포르투갈로 갑니다!” 순례길 이틀째 아침, 배낭을 멘 가이드가 해맑은 얼굴로 소리쳤다.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고? 일행의 입이 일제히 벌어졌다.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버스 창밖 풍경에 어리둥절하기를 잠시, 이윽고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e′s)의 출발점인 투이(Tui)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나 포르투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에 선 이 국경 도시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아, 이제 정말 순례길에 들어섰구나’ 하고 실감한다고. 우리는 가이드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잇는 긴 철교를 걸었다. ‘이게 정말 순례길이 맞나?’ 갸웃거릴 때마다 철교 바닥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바람이 불자 길이 약 340km에 달하는 미뇨 강(Rio Miño)이 다리 아래에서 유속을 높이며 도미노처럼 잔물결을 일으켰다. 강 건너편에는 포르투갈의 국경 도시 발렌사 두 미뉴(Valença do Minho)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10여 분 만에 비자나 입국심사 없이 다리 하나를 건너 다른 나라에 도착한 것이다. 포르투갈 땅에 첫발을 디딘 순간, 거짓말처럼 거센 비가 쏟아졌다. 오래전 스페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발렌사의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판초 우의를 뒤집어쓴 각국의 순례자들이 “부엔 카미노(Buen Camino)!”라며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포르투갈 길을 지나는 순례자들.
잠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우리는 갈리시아의 해안 마을 아과르다(A Guarda)의 몬테 산타 트레가(Monte Santa Trega) 산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기원전 1세기경 켈트족이 거주했다는 요새 유적지에는 돌로 쌓은 원형 움막 수십 채가 언덕을 따라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그 장엄한 풍경과 마주하는데, 문득 고요한 절에 들어선 듯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 오늘처럼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날에도 순례자들이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강보라
소설가.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티니안에서>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5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최근 저서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 있다.
Credit
- 글 강보라
- 사진 ©TurespaN~a / ©Axencia Turismo de Galicia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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