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우리는 왜 마법소녀를 영원히 사랑할까?
오직 소녀들을 위한 세계에서 구축된 마법소녀의 이미지. 그 예정된 쓸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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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일러문> 이전에도 마법 소녀물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전의 마법 소녀들이 착한 마녀나 요정에 가까웠다면 <세일러문> 전사들은 전투의 주체로 강력한 파워를 자랑했다. <세일러문>의 대성공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웨딩 피치> <마법기사 레이어스> <신풍괴도 잔느> <카드캡터 체리> 주인공들의 전투력은 어떻고! 평범한 소녀였던 이들은 변신 단계를 거쳐 강인한 전사이자 수호자로 거듭나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한다. 때때로 스케일은 지구를 벗어나 <슈가슈가룬>의 쇼콜라와 바닐라처럼 마계의 차기 여왕 자리를 두고 격렬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2024년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마법 소녀물은 다름 아닌 <캐치! 티니핑>이다. 국산 3D 애니메이션으로 2010년대를 풍미한 <시크릿 쥬쥬>의 영광을 잇는 <캐치! 티니핑>은 2020년 첫 방영됐다. 이모션 왕국의 소녀 로미는 뿔뿔이 흩어진 요정 ‘티니핑’을 캐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구에 도착한다. 이후 하트로즈 베이커리 직원들과 우정을 쌓으며 성장한다는 이야기의 토대는 변신 소녀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잠을 푹 자는 ‘코자핑’, 말 많은 ‘떠벌핑’, 엄살쟁이 ‘아야핑’ 같은 직관적인 티니핑들의 속성에서 짐작 가능하듯 <캐치! 티니핑>의 타깃은 훨씬 어린 아동이다. 제작되는 작품들의 편수와 장르가 다양해지고, 유튜브와 OTT를 토대로 국내 3D 애니메이션 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같은 작품을 여섯 살짜리 유치원생도, 열두 살 소녀도 함께 봤던 시대는 일찍이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이는 언젠가부터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의 캐릭터 디자인과 세계관이 ‘굿즈’를 중심으로 기획되는 탓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속성의 티니핑들을 모은다는 설정에서 <포켓몬스터>를 닮기도 한 <캐치! 티니핑>의 티니핑들은 복잡한 진화 과정 없이 시즌마다 증식한다. 한 경제지의 표현에 따르면 이 때문에 부모들 사이에서 ‘파산핑’이라고 불릴 지경. 게다가 모든 마법 소녀의 손에는 변신 아이템과 반짝이는 요술봉이 쥐어지기 마련이다. <꼬미마녀 라라> <바랄라 페어리즈> 등 지금 여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국산 애니메이션의 요술봉은 다양한 음악과 색을 발하며 마트 진열대에서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문 크리스탈 파워 메이크업!”을 외치며 자랐던 여자아이들이 수십만 원에 거래되는 초기 ‘문스틱’ 매물을 찾는 어른으로 성장한 지금, 1990년대와 2000년대 소녀들이 추구했던 미소녀 전사의 이미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은 K팝 걸 그룹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에 발표한 제니의 솔로곡 ‘You & me’는 <세일러문>의 원작자 다케우치 나오코가 작화를 맡았다. 레드벨벳은 정규 3집 <Chill kill> 티저 사진에서 방패와 활 · 검 등 강인한 전사 이미지를 활용했으며, 전통적인 의미의 마법 소녀는 아니지만 강력한 힘으로 ‘타운스빌’을 수호하는 <파워퍼프걸>과 적극적으로 협업한 뉴진스도 있다. 지난 5월 13일과 15일, 이틀 간격으로 나란히 공개된 에스파의 ‘Supernova’, 아이브의 ‘Accendio’는 강인한 소녀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연대라는 공식을 차용했다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이다. ‘Supernova’ 뮤직비디오에서 에스파 멤버들이 각각 괴력(카리나), 비행 능력(윈터), 점화(닝닝) 등의 초능력을 가지고 아직 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멤버(지젤)의 각성을 도우려 한다. 일찌감치 자체 콘텐츠 <이터니티 플라워>를 통해 변신 소녀물의 서사를 쌓아온 아이브의 ‘Accendio’는 마법 소녀물의 모든 요소를 고스란히 ‘때려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리포터> 속 주문을 차용한 제목부터 시작해 멤버들의 변신 장면, 세일러문과 다크문의 대립을 떠올리게 하는 백색 아이브와 흑색 아이브, 잘 짜인 액션 신, 이 대결의 구심점에 놓인 ‘요술봉’까지!
가장 매력적인 요소들이 시각적으로 활용됨과 동시에 이야기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K팝 신에서 마법 소녀물의 이미지가 꾸준히 활용되는 이유는 지금의 걸 그룹이 잠재적 팬층, 특히 소녀들에게 어필하고 싶은 매력과 일치하기 때문 아닐까? 특히 여러 명이 하나의 스쿼드를 이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마법 소녀물의 특징은 팀워크와 멤버들의 관계성을 각별하게 여기는 K팝 그룹의 주요 서사와도 이질감 없이 맞물린다.
여자아이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근사한 모든 것…. 잘 알려진 <마더 구스>의 한 문장처럼 마법 소녀물은 소녀들이 좋아할 온갖 요소로 채워져 있다. 남성이 세상의 ‘디폴트’를 자연스럽게 차지하는 현실에서 여자아이도 용감한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남성은 주변부의 인물에 그친다는 점에서 마법 소녀물의 메시지가 소녀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쓰기도 했다.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변신 장면을 검열하는 것은 어른들의 시선일 뿐. <세일러문>을 열렬히 사랑하는 소녀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싸우는 세일러 전사들의 의상을 선정적으로 여기거나, 높은 힐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갈수록 강해지고,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전사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라고.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지금은 반짝이는 보석과 귀여움, 달콤함을 포기하지 못한 마법 소녀들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소녀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스태프가 한뜻으로 만들어준 이미지 속에서는 더없이 건강하고 자존감 높아 보이지만 사실은 가냘픈 몸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외모의 변화를 지적하는 시선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K팝 아티스트들. 그리고 그런 걸 그룹 멤버들의 모습을 훨씬 어린 나이부터 보고 자라며, 한창 성장기임에도 자신의 몸을 검열하고 식이 제한을 하는 연령대가 자꾸 낮아진다는 뉴스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갖는 임파워링의 한계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됐다. 언젠가부터 ‘여성 서사’가 콘텐츠의 차별화 요인이 되며, 그 어떤 시기보다 강인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성 캐릭터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지금, 정작 현실의 여성들은 어느 때보다 다각화된 성범죄와 무분별한 폭력에 휩싸여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교제 폭력과 살인 기사가 일어나지만, 그 죗값에 걸맞은 판결을 찾아보는 것조차 어렵다. 어른이 된 우리가 지금의 소녀들에게 만들어줘야 할 것은 달콤하게 설탕으로 코팅된 변신물 속 판타지나 시즌별로 달라지는 요술봉이 아니라 현실 제도와 인식의 변화다. 까맣게 빛을 잃은 요술봉을 직시하는 일이 다소 쓸쓸하고 마음 아프다고 해도.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가 장승원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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