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장인의 무기

3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지 작업을 잇는 건 신비롭고 숭고한 일이다. 갈고 닦고 꿰매고 찍어내며 매일을 성실히 살아온 네 명의 명장, 이들의 땀과 손때가 묻은 무기를 소개합니다.

프로필 by 정소진 2024.06.04
신달자 시인의 <지진> 인쇄 원판을 쥔 권용국 식자공의 손.

신달자 시인의 <지진> 인쇄 원판을 쥔 권용국 식자공의 손.


식자에 필요한 모든 물건. 납 활자를 골라내는 핀셋, 최소 2mm 너비의 조각에 활자를 확인하기 위한 돋보기, 간격을 맞추는 용도의 나무와 쇳 조각. 활판을 엮는 작업을 하려면 실과 가위가 필요하다.

식자에 필요한 모든 물건. 납 활자를 골라내는 핀셋, 최소 2mm 너비의 조각에 활자를 확인하기 위한 돋보기, 간격을 맞추는 용도의 나무와 쇳 조각. 활판을 엮는 작업을 하려면 실과 가위가 필요하다.


권용국 식자공이 74년간 마주한 조판대. 그의 노력과 역사가 깃들어 있으며, 고유 활판 인쇄 문화의 근원지다.

권용국 식자공이 74년간 마주한 조판대. 그의 노력과 역사가 깃들어 있으며, 고유 활판 인쇄 문화의 근원지다.


활판공방 식자공•권용국
1934년생 권용국은 올해로 아흔 살이다. 쇠나 납을 녹여 활자 조각을 만들고, 이 활자를 원고 모양대로 활판에 줄 맞춰 배열해 인쇄기에 올려 찍어내는 조판 과정에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해 채우는 일을 식자라고 칭한다. 그가 식자 일을 처음 한 건 초등학교를 늦깎이로 졸업한 열여섯 살. 1년 후 6·25전쟁이 났다. 피란길을 떠난 그는 부산에서 암표 파는 일, 구두닦이, 등 갖은 일을 했지만 조판대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휴전으로 서울로 돌아간 그는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부터 찾았다. 모든 게 불타 사라지고 잿가루가 날리는 서울에서 인쇄소를 지켰다. 1990년대에는 서울을 떠나 외국에서 식자 일을 지속했다. 2002년에 다시 찾은 서울은 모든 게 자동화됐고, 그 틈에서 활자를 꼭 붙잡기 위해 지금의 파주출판단지 활판공방에 취직했다. 다시 조판대 앞에 선 권용국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비가 2mm인 가장 작은 활자부터 다양한 크기의 활자 조각을 만졌던 열여섯 살의 작은 손은 74년이 흐른 지금은 두툼하고 투박해졌다. 이 일을 가꿔온 당신의 무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조판대를 가리켰다. 조판대를 빼곡하게 수놓은 활자들과 핀셋, 가위, 활판을 묶는 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내 손을 거쳐간 책을 누군가는 볼 거 아니에요. 그게 좋아서 한 일이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보람 하나만으로 살아갈 겁니다.” 현재 활판공방은 주로 시집을 찍어내는 작업을 한다. 우리나라 고유 활판 인쇄 문화를 묵묵히 이끄는 권용국은 오늘도 성실히 공방으로 향한다.


침선 작업이 지루할 때면 만들곤 했던 골무.

침선 작업이 지루할 때면 만들곤 했던 골무.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장정완으로부터 물려받은 버선 교본.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장정완으로부터 물려받은 버선 교본.


 어머니가 어린시절 강화도에서 얻어온 침선 바구니와 스승 장정완이 사용했던 가위.

어머니가 어린시절 강화도에서 얻어온 침선 바구니와 스승 장정완이 사용했던 가위.


어머니가 시집을 앞두고 직접 손바느질한 수저집과 당시 사용했던 가위.

어머니가 시집을 앞두고 직접 손바느질한 수저집과 당시 사용했던 가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면실 타래와 실을 감아두는 용도로 쓰인 실패. 여든 살이 넘은 어머니가 20대 시절부터 사용했던 것들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면실 타래와 실을 감아두는 용도로 쓰인 실패. 여든 살이 넘은 어머니가 20대 시절부터 사용했던 것들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전승교육사•박영애
박영애는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전승교육자다. 1964년에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바느질에 소질을 보였던 그.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여동생 의상을 직접 손바느질하려는 마음이 침선으로 빠져드는 계기가 됐다. 1989년, 침선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 장정완과 인연이 시작돼 바느질과 매듭, 염색, 종합공예예술을 사사했다. 당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의 전신인 경복궁 석조전에서 밤샘 작업으로 지루할 때면 골무에 자수를 놓았고, 한복이나 버선, 이불보를 만들고 나온 천 조각을 염색해 단정한 조각보를 완성하면서 기쁨을 누렸다. 18년간 물려받은 침선 기술을 비롯해 스승의 손맛이 담긴 버선 교본, 조각보, 가위 같은 것들을 지금도 간직하는 박영애. ‟바느질하며 괴로울 때 꺼내 봐요.” 스승과의 인연은 그의 며느리이자 국가무형문화재 구혜자에게 이어졌다. 박영애의 20대 시절부터 60대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한 두 스승의 가르침 이전에 그를 바느질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친정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수저집에 화려한 자수를 놓아 시집살이를 마련하고, 행주치마를 직접 만들었다. 인두 받침대에도 자수를 놓곤 했다. 호롱불 아래서 바느질하는 어머니 모습만큼 아름다운 게 없었다던 박영애는 친정집에 화재가 나 어머니가 쓰던 침선 도구를 잃은 게 한이라고 말했다. 실을 감아 놓는 실패와 침선 바구니, 인두 받침대, 자, 몇 가지 남아 있는 물건은 지금도 가끔 사용한다. 광장시장에 한복집이 사라지고 유명 카페 체인점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곤 절망스러웠다는 그는 전통 복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침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시와 침선 교육을 놓지 않고 있다.


이명균 작가가 빚은 청자 다구.

이명균 작가가 빚은 청자 다구.


빛의 각도에 따라 색과 오로라가 달리 보이는 청자 찻잔. 다섯 가지 모두 크기가 미세하게 제각각이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과 오로라가 달리 보이는 청자 찻잔. 다섯 가지 모두 크기가 미세하게 제각각이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차 명인•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박동춘은 우리나라 전통차의 적통인 ‘초의차’ 5대 계승자다. 1953년생인 그의 차 인생은 해남 대흥사 방장 스님이자 근세에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초의 종사의 다풍을 이어받은 응송 스님이 쓴 책 <동다전통고> 원고 윤문 작업에서 시작했다. 1979년부터 응송 스님과 수행처인 대흥사 백화암에서 4년 동안 함께 지내며 초의차 이론과 제다법을 이어받는 과정에서 차가 얼마나 가치 있는 문화적 산물인지 알게 된 그는 차 연구에 더욱 빠져들었다. 고려시대 청자 다도 문화까지 범위를 넓힌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시대는 가장 괄목할 만한 차 문화가 있었던 시기였어요. 당대의 차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기술력과 도구의 발달, 미감, 예술성 등 모든 부분에서 수준 높았던 고려시대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2010년, 다구 문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옛사람은 도자기를 만들 때 고령토를 직접 채취했는데, 그 과정에서 흙을 섞고 비와 바람에 노출시키는 수비 과정을 거치면 가장 미세한 흙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공장에서 고령토를 만들기 때문에 정제된 흙을 쓸 수 없는 것이 한계라고 한다. 차를 담았을 때 아린 맛이나 탁한 맛이 나지 않으려면 정제된 고령토를 1300℃에서 굽고, 특유의 화한 맛을 보존하려면 적당한 유약 두께를 구현한 도자기를 완성해야 한다. 박동춘은 도예가 이명균과 손잡고 청자 다구 연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유약 두께와 태토의 원형성을 연구 중이며, 가장 발전된 청자의 유형과 태를 만들어냈던 11세기 청자를 재현하는 것이 그의 목표. ‟한국성은 독특한 우리 문화입니다. 결과 심성을 담아내야 하죠.” 고려시대부터 존재한 전라남도 순천 대광사 인근 야생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고려시대 때 지식인이 마셨던 흰 거품이 자잘한 연고백차를 내리며 고유의 다도 문화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뜻을 세우면 결국 성취하고야 마는 뚝심을 가지고.


세로로 긴 한국식 먹 틀과 ‘ㅍ’ 자 형태의 일본식 먹 틀. 한국식 틀은 원하는 크기의 먹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나무 조각을 분리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더디다. 반면 일본식 틀은 한 가지 크기밖에 못 만들지만 작업 속도가 빠르다. 원하는 문양을 나무에 새겨 찍어낼 수 있다

세로로 긴 한국식 먹 틀과 ‘ㅍ’ 자 형태의 일본식 먹 틀. 한국식 틀은 원하는 크기의 먹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나무 조각을 분리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더디다. 반면 일본식 틀은 한 가지 크기밖에 못 만들지만 작업 속도가 빠르다. 원하는 문양을 나무에 새겨 찍어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누이들을 그린 먹.

조선시대의 누이들을 그린 먹.


취묵향 공방 먹 장인•한상묵
37년간 새카만 먹과 살아온 한상묵은 우리나라에서 전통 먹을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1988년, 이모부가 운영하는 먹 공장에 입사하면서 먹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상묵은 송연 먹의 역사를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제조법을 연구하려 했지만, 국내에는 송연 먹을 만드는 사람이 없었고 자료나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송연을 채취할 가마를 찾았고, 2002년 원하던 송연가마를 자신이 운영하는 취묵향 공방에 전통 방식으로 재현했다. 가마에 구멍을 뚫어 항아리로 덮으면 소나무를 태울 때 발생하는 그을음이 항아리 안쪽 면에 달라붙는다. 소나무를 태우는 기간은 열흘. 하루 동안 가마를 식힌 다음 한상묵은 가마에 들어가거나 항아리를 들어 올려 그을음을 긁어모은다. 이 그을음에 소가죽과 소뼈를 고아 만든 아교를 섞어 밀가루 반죽을 치대듯 3만 번가량 치댄다. 그런 다음 나무 틀에 넣어 원하는 모양으로 찍어낸다. 먹을 소나뭇재 속에 넣고 1주일 동안 건조한 후 천정에 매달아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동안 건조한다. “서예 문화가 쇠퇴해 전통 먹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제자들이 계승을 포기할 만큼.” 원래 한상묵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으나 둘 다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전통 먹이 경제력이 떨어지고 사양산업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그는 신라 먹과 고구려 먹이 동양 문화를, 직지를 찍은 고려 먹은 세계 문화를 바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연구와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진정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평생을 바친 그는 투박한 손으로 먹 반죽을 뭉개 틀에 넣고 꽉 누르는 작업을 홀로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10년 동안 천정에 매달려 송연 먹이 건조해질 인고의 시간처럼.


Credit

  • 에디터 정소진
  • 사진가 장승원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