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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아파트에서 발견한 가장 도시적인 삶

건축가 황두진이 도시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건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로필 by 윤정훈 2024.04.05
황두진
도시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건물은 어때야 할까? 건축가 황두진이 상가 아파트에서 발견한 ‘가장 도시적인 삶’.

한국사회에서 단지화된 아파트는 오랜 숙제다. 주택난 해소의 주역이지만 주거 획일화와 도시 단절을 비롯해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그간 많은 논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단지 개념이 공고한 이유는
여러 이유로 우리 사회에는 좋은 대안보다 열등한 방법이 보편화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의 모든 현행 법 체제는 단지형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일정 규모 이상의 단지를 건설하면 그에 따라 마땅히 갖춰야 할 기반 시설이 있다. 어린이 놀이터, 주민 휴게시설 등을 사업자, 즉 민간이 해결해야 한다. 그만큼 공공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다. 공공은 도로를 비롯한 기본적인 인프라만 구축하면 되고 그 외는 건설사와 입주민의 몫이 된다. 아파트가 비싼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단지 규모로 개발할 때 따라오는 효율성이나 편리는 부정할 수 없으나 장기적으로는 도시를 망치는 길이다. 모두가 함께 이용하던 길이 없어지고, 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땅이 생겨난다. 엄청나게 많은 시민이 ‘주거 공동 운명체’가 돼 단지 전체가 재건축되기까지 몇십 년을 기다리는 게 지금의 상황인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대규모 미분양 등 부작용이 나오고 있지만, 워낙 거대한 시스템 탓에 관성적으로 단지를 계속 짓는 것이다.


단지형 아파트에 대응하고 도시에 적합한 건축 유형으로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 있다. 쉽게 말해 주거와 다른 기능이 적정 밀도로 섞인 유형으로 저층부(상가), 중층부(업무 · 교육 · 의료 등), 고층부(주거 · 옥상 마당)로 이뤄진 ‘수직 마을’을 뜻한다
건축가로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덜 짓고 덜 움직이는 동시에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모든 층의 용도가 같은 ‘시루떡 건축’만 있는 탓에 일하는 곳에서는 오직 일만 하고 사는 곳에서는 살기만 한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구가 이동에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쏟고 삶의 질은 떨어졌다. 여기에 도시 확산에 따른 환경오염, 인프라 확충을 위한 과도한 투자와 유지 비용이 뒤따랐다. 기본적으로 도시 주거 문제는 ‘공동 주거’로 풀어야 한다. 단독주택은 도시의 밀도를, 단지형 아파트는 도시의 복합을 충족시킬 수 없다. 주상복합의 주거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주거와 상업, 그 외 다른 기능이 잘 섞이려면 세심한 설계와 기술력도 필요하다. 다양한 이용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시민 의식수준도 지금보다 높아져야 한다. 건물 규모는 어느 정도면 좋을까. 최소한 5층 내외의 중저층 건물만으로 도시 평균 용적률을 250%로 만들 수 있다. 이는 현재 서울시 평균 용적률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즉 도심에 충분한 인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세권의 경우는 필요에 따라 조금 더 고층화하면 된다.


무지개떡 건축에 부합하는 사례로 1960~70년대에 활발히 생겼다 사라진 ‘상가아파트’를 들었다. 국내 다양한 상가아파트의 의미와 가치를 살핀 책 <가장 도시적인 삶>을 내기도 했다
그보다 앞서 펴낸 <무지개떡 건축>에서 상가아파트를 간략하게 언급한 적 있다. 그러다 서울신문사의 제안으로 상가아파트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직접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2주에 한 번씩 답사 · 촬영 · 자료 조사 · 인터뷰를 진행했다. 30회가량 연재를 이어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다. 소위 ‘아파트 덕후’들로부터 제보도 많이 받으며 전국의 다양한 상가아파트를 알리는 데 힘썼다. 책에서 다룬 사례 상당수는 낡고 낙후되어 있다. 하지만 대안적 도시건축 유형의 레퍼런스로 삼기에는 충분히 좋은 요건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상가아파트는 단지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자취를 감춘 유형 아닌가
당시 대부분의 상가아파트는 주차장법 이전에 지어져 주차장을 갖추지 않았다. 주택건설촉진법의 영향도 크다. 사회 여건이나 건축 수준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라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만 것이다. 지금은 고도성장기를 지나 인구가 다시 도심으로 회귀하고 있다. 현재 도심 어디에 단지형 아파트를 지을 땅이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상가아파트가 돌아올 시점이라고 본다.


상가아파트의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까?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서소문아파트는 상업 가로(街路)와의 연속성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례다. 상업 가로는 도시를 도시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흔히 말하는 ‘걷고 싶은 거리’가 가로수가 있는 산책로만은 아니라는 데 공감 포인트가 있다. 단지 아파트와 면한 가로 대부분이 그런 형태지만 보행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다. 각양각색의 상점이 쭉 이어진 거리는 보고 즐길 거리가 많다. 이때 중요한 건 거리의 활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가로를 따라 길게 들어선 서소문아파트의 1층은 상가이고 중간에 건물 뒤편 골목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양 끝 코너에 놓인 상점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개방돼 있어 보행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서소문아파트는 밀도나 복합의 정도, 입지 조건도 훌륭하다. 걸어서 5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하고, 충정로역과 서대문역과도 가깝다. 인근엔 시장도 있다. 신도시에 이 정도 인프라를 갖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은가.


기존에 조성된 도시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뜻인가
서울의 인구 그래프를 그려보면 도넛마냥 가운데가 텅 비어 있다. 중구나 종로구 같은 구도심을 신도시로 만들어 5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통계별로 상이하나 종로구와 중구의 인구는 25만 정도인데, 과거 구도심의 인구는 50~60만 명까지 달한 적 있다.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었음에도 말이다. 교외 신도시와 GTX 같은 교통망 확충이 유일한 대안처럼 논의되고 있는데, 그에 따른 에너지 낭비와 환경적 부담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 정도 규모의 사업을 구도심을 대상으로 진행해 보면 어떨까. 도시 재생 차원을 넘어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역사 보존을 고려해 보다 섬세한 접근이 요구되나, 그 정도의 경험과 감각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이미 내재돼 있다. 결국 필요한 건 정책적 결단이다.


기존의 상가아파트를 고쳐 쓸 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
충정아파트를 대상으로 공공 프로젝트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 워낙 오래됐고 손상된 부분도 많지만, 역사적 가치도 있는 곳이니 현행 건축법에 맞게 내진 설계를 보강하고 공공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활용하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어렵겠으나 기존의 대단지 아파트를 레너베이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존 단지의 해체는 건축가끼리 모이면 항상 하는 이야기다. 단지 내 도로를 공공이 매입해 법적 도로로 만든 다음 ‘무지개떡 건축’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저층부에 상가와 유치원, 빨래방, 동사무소 등이 들어서고 그 위로 집, 꼭대기엔 공용 옥상 정원과 독서실이 들어서면 어떨는지. 물론 거주자들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한데, 지문 인식 등으로 외부인 출입을 적절히 차단하면 되는 문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한 가지 더해진 생각은 모든 개별 건축물이 무지개떡일 필요는 없겠다는 점이다. 걸어서 15분 반경 1km 내에 상업 · 교육 · 문화 · 의료 기능을 갖춘, 이른바 ‘무지개떡 커뮤니티’로 단지를 바꿀 수도 있겠다.

최근 재건축 기준이 위험성에서 노후성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지어질 공동주택에 대한 생각은
노후한 건축물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을 대체할 만한 양질의 건축 유형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 짓는 건물은 정말 잘 지어야 한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동원하는 일이지 않나. 대충 짓고 30년 뒤 또다시 부수고 짓기를 반복할 셈인가.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