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영의 술 권하는 사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아비도, 장인도 못 알아보는 술'이란 게 있다. 강호의 주신(酒神)들이 노시던 주계(酒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세 가지다. 낮술, 해장술, 그리고 새벽술. 부모도 못 알아보니 패가망신 할 술 같지만, 그 의미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맛있다는 얘기다. 이 술의 신이 강림하시면,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 일상,낮술,자유로운,편안한,정겨운,엘르,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일상,낮술,자유로운,편안한,정겨운

'아비도, 장인도 못 알아보는 술'이란 게 있다. 강호의 주신(酒神)들이 노시던 주계(酒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세 가지다. 낮술, 해장술, 그리고 새벽술. 부모도 못 알아보니 패가망신 할 술 같지만, 그 의미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맛있다는 얘기다. 이 술의 신이 강림하시면,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세 가지 술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낮술이다. 낮술엔 고유의 매력이 있다. 여기서 낮술은 '주신'들의 점심 반주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 한 술 자리를 말한다. 은근 슬쩍 다가와 여유로운 오후의 평온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그 분' 말이다. 작정하고 시작하면 도무지 브레이크가 없는, 그 짜릿한 낮술의 쾌감은 우연성과 의외성에 있다. 예기치 못한 사람과 마시는 갑작스러운 낮술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낮술에 늘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 약속하고 마시는 술은 낮술이 아니다. 그건 미친 짓이다. 진정한 낮술의 또 다른 매력은 일탈이다. 해야 할 일 다 제치고 아슬아슬하게 먹는 낮술의 맛은 가히 천하일미! 술 자리가 질펀해지면 일, 직장 상사, 안중에도 없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그냥 마시는 거다. 거기에 날씨까지 장단이 맞으면 일 난다. 하늘이 '하~ 수상한 날' 마시는 낮술은 인생유희의 보약이다. 한낮의 일탈, 우연히 찾아온 외도, 자주 오시면 곤란하지만, 가끔 영접해 준다면 갑갑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삶의 행간을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채워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낮술을 마시는 건, 괜한 설정이 아니다. 낮술로 시작한 주인공들의 일탈은 결국 인간의 밑바닥과 마주한다. 그 곳에서 인간의 본성을, 세상의 이치를, 부조리한 현실을 만난다. 낮술이 맛있는 건, 나와 세상을 모두 무장해제 시키기 때문이다. 낮술이 민망하고 낯 부끄럽다고? 부끄러운 당신은, 술꾼이 아니다. 낮술을 맛있게 즐기려면 궁합 맞는 안주가 있어야 한다. 짬뽕 국물과 함께 마시는 고량주도 좋지만, 뭐니뭐니 해도 낮술에 제격은 순댓국이다. 돼지 등뼈로 내는 육수는 대한민국 술꾼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국물 아닌가. 순대는 돼지피로 만들어 간과 빈혈에 효험이 있으며, 특히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좋다. 돼지 내장은 납과 수은 등 체내 독성을 풀어준다. 무엇보다 육류와 곡류, 채소 등이 두루 들어 있는 완전 식품이다. 언젠가는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친구와 점심을 먹으려고 순댓국집을 찾았다. 두주불사 죽마고우와 순대국의 만남,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한낮의 햇빛을 받으며 시작한 술자리. 한 잔 두 잔, 잔이 돈다. 소주 병이 쌓인다. 묵히고 삭힌 인생 얘기가 쌓인다. 낮술이 정지시켜 놓은 어느 한낮의 일상. 때론 그 일상이 삶의 보약이 된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