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독 가을날 전어를 예친함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친구도 밉고, 동료도 부질없고, TV 속 뉴스들은 끔찍해서 입맛이 뚝 떨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를 먹으러 갔다. |

아주 사적인 순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킁킁 한껏 달아 오른 코는 분주하게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건너편 마당 한 켠에서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요리사 한 명이 석쇠에 무언가를 굽고 있었다. 절반의 호기심과 절반의 본능에 끌려 좀비처럼 다가갈수록 고소한 연기와 냄새도 깊어져만 갔다. 요리사의 어깨너머를 살짝 기웃거렸다. 연탄불 위의 석쇠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생선 몇 마리가 나란히 누워 있는데 노릇노릇 때깔도 참 고왔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이 냄새, 심상치가 않았다. 원래 음식점이든 집이든 연기를 피워내는 건 질색이지만 이건 왠지 깔끔한 이슬이라도 한 잔 곁들이면 딱일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9월.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아, 가을. 그렇다. 가을 전어라는 놈이 있었지. 약속 시간에 쫓겨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뒤늦게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뭔가 빠진 것 같더라니. 어쩌면 그저 단순한 욕구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냉정한 체중계는 날마다 낯선 숫자를 가리키며 기대를 배신했지만 요즘 통 입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꾸역꾸역 맛도 없는 걸 몸속에 집어 넣는 원리는 단순했다. 피곤하니까. 하루 두 번, 점심 시간과 저녁 시간은 정당한 휴식 시간 같은 거였다. 학창 시절 50분의 수업이 끝난 후 종소리와 함께 반드시 찾아오는 쉬는 시간처럼 당연한 권리. 그걸 포기할 수는 없어서 나는 또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문제는 그 쉬는 시간의 질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나서는데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이건 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며칠 전 입맛만 다시다 돌아서야 했던 전어구이가 다시 눈에 아른거렸다. 약간 쌀쌀하다 싶은 요즘이야말로 녀석들이 가장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고 기름기가 넘쳐 구워먹어도 무쳐 먹어도 어떻게든 가장 맛날 때였다. 알면서 이걸 놓치고 있다니. 디자이너들이 반짝 새로운 디자인의 물량을 풀었다 매진되면 그만인 것처럼 한 달이 지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이러다 가을 다 가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다면 누구와 가지?’ 라는 의문과 함께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아, 한 명 있었다. 오리구이를 먹겠다며 왕복 세 시간을 불편해하지 않으며 기꺼이 아무 날도 아닌 보통 목요일 저녁 경춘선을 달리는 사람. 밤 아홉 시,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선 그에게 말했다. “우리, 전어 먹으러 가요.” 반드시 밀실 살인의 트릭을 풀고 범인을 잡고 말리라 결심하는 소년 탐정 김전일 보다 비장하게. 밥 도둑, 술 도둑 논현동 ‘바다가 온다’는 꽤 큰 규모의 횟집이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테리어는 흔히들 앞에 동네 이름이 붙곤 하는 보통의 ‘수산’집과 일식집의 중간쯤 된다. 퇴근 후 한잔 가볍게 꺾으러 들르는 아저씨들부터 오붓하게 식사하려는 연인들까지 골고루 잘 어울리는 곳이다. ‘전어구이를 먹어야지.’라고 작정하고 미식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다 청담동에서 퓨전 일식을 전문으로 하는 오너 셰프의 추천으로 처음 들른 곳이었다. 회를 기본으로 다양한 생선을 취급하지만 역시 제철을 맞아 전어 요리를 별미로 선보이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선 요리사가 전어에 칼집을 넣어 소금을 살살 뿌려 노릇하게 굽고 있었다. 꼴깍꼴깍 군침이 넘어갔다. 전어하면 예부터 유명한 충남 서천 홍천항, 전남 광양 망덕 포구, 전남 보성 율포항 등지는 가을만 되면 식도락가들로 유난히 북적거린다. 서울의 횟집으로 올라오는 전어들도 알고 보면 대부분 이곳 출신이다. ‘바다가 온다’ 또한 마찬가지여서 수족관에 있는 전어들은 아침 일찍 보성에서 출발한 것들이라 했다. “물고기들도 모두 성격이 제각각이에요.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광어나 우럭의 경우엔 꽤 착한 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요즘 한창인 전어나 은갈치 같은 녀석들은 무척 예민해요. 잘 움직이지도 않고. 하루를 넘기면 금세 죽는 것도 그만큼 예민한 성격으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만큼 더 싱싱한 전어를 먹을 수 있는 건 모두의 즐거움이죠.” ‘바다가 온다’의 안창국 대표가 말했다. 전어는 봄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여름 내내 플랑크톤을 잔뜩 먹고 20cm 정도 자랐을 때가 가장 맛있다. 몸속의 지방이 다른 계절에 비해 약 세 배 정도 높아지는데다 머리까지 통째로 먹을 수 있을 만큼 뼈가 연해지기 때문이다. 더 작으면 아직 먹기엔 덜 자란 것이고, 더 크면 가시가 거칠어진다. 이처럼 딱 좋은 사이즈로 자라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가을 전어’라는 별명이 붙은 건 그래서다. 전어란 이름 또한 너무 맛있어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돈 생각하지 않고 사 먹는다고 해서 ‘돈생선’ 이라고 불렀다 한다.맛도 맛이지만 단백질과 지방이 가장 적절하게 축적되는 가을철은 전어의 영양 또한 절정을 이루는 시기. 콜레스테롤을 낮춰 성인병을 예방하고 두뇌 개발이나 피부 미용에도 좋고 잔뼈를 통째로 씹어먹으니 칼슘 보충 효과도 있다. 알면 알수록 정말 가을 전어에게 붙어 있는 수많은 별명처럼 보약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 전어는 크게 회와 무침, 구이로 먹는 게 일반적이다. 생선 요리가 익숙지 않거나 전어를 처음 먹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난한 건 아무래도 무침이다. 흔히 ’세꼬시’라 불리는, 뼈까지 함께 썰어먹는 회를 야채와 고추장과 갖은 야채에 버무려 얼큰하게 내놓는 게 일반적인데 한 입맛을 돋워주는 상큼함이 그만이다. 정작 구이 요리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마니아들은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고소한 감칠맛에 한 표를 던지지만 여전히 잔 가시에 불편해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역시 전어구이를 먹으려면 처음엔 좀 적응이 되지 않더라도 잔뼈까지 전부 씹어먹어야 제격이다. 가시를 바르기 시작하면 이것만큼 귀찮은 요리가 또 없거니와 가을 전어뼈는 목에 걸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부드러우니 안심해도 된다. 부드러운 가시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어차피 한철이다. 마니아들은 전어 요리에 익숙해지고 내공이 쌓이면 시샤모 구이처럼 머리부터 꼬리 지느러미까지 아작아작 씹어먹어야 진짜라고 충고한다. 연애할 때 가장 섹시한 남자의 모습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생선구이의 뼈를 발라주는 거다. 다정함이야말로 섹시함이니까. 하지만 밥상에서 전어에 탐닉하다 손으로 꼬리를 잡고 머리부터 전어구이를 먹어 치우는 여자를 보고도 화들짝 놀라는 대신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남자야말로 매력적일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어두일미를 해치울 수 있는 내공부터 길러야겠지만. 전어회는 상추나 깻잎에 싸서 된장쌈장을 넣어 먹어야 맛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하지만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전어회를 묵은 김치나 김에 싸먹는 건 또 다른 별미다. 그런가 하면 전어가 많이 잡히는 남도 지방에선 젓갈을 담그기도 하는데 싱싱한 전어 내장 중 ‘밤’만 골라 만든 전어밤젓에 제대로 길이 들면 밥 한 공기도 뚝딱 비벼 먹는다고 한다. 슬로 푸드의 즐거움전어회와 무침과 구이를 욕심쟁이처럼 모두 주문해선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인 행복한 밥상을 마주하는 동안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집에서 먹으면 왜 이 맛이 안 나는 걸까? 회야 워낙 신선도가 중요하다지만 그야말로 굽기만 하면 될 것 같아 생선구이에 도전했다가 두 번 실패하고 포기했던 생각이 났다. 함께 전어회와 구이를 양념 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안창국 사장은 일반 가정에서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연탄이나 숯불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가장 크다고 했다. 아울러 그가 전해준 유용한 팁 하나는 생선을 담는 접시를 미리 따뜻하게 데우거나 깻잎을 깔아 그 위에 담으라는 것이다. 집에서 먹을 경우 아무리 따끈하게 구워도 막상 접시에 담아내면 금세 식기 때문에 온도 차로 물기가 생기기 쉬운데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선 요리는 아무리 소문난 식당이어도 그날 상태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업주의 입장에서는 늘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건 돈이 든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온도 시스템을 갖춘 수족관은 가격도 비싸거니와 멀리 남해나 동해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은 신선하게 바닷물로 보존해야 하는데 한 번 물갈이하는 비용만 해도 쏠쏠하다. 싸구려와 진짜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이런 기본 투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계절마다 맛과 질감이 달라지는 전어를 보면 역시 모든 건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웰빙 푸드 혹은 슬로 푸드라 별명이 붙은 다른 모든 음식들처럼. 결국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결국엔 늘 기본으로 정답이 기울어진다. 자연의 주기를 거슬러 인위적으로 키워낸 것이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땅의 기운을 받으며 자연의 일부로 자라난 것들을 되도록 원 재료의 맛을 살려 담아내는 것. 지난 주말엔 모처럼 완도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광주식당’에서 한정식을 시켰는데 바닷가답게 역시 각종 해물로 채워진 반찬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고추장으로 맛깔 나게 버무린 전어무침도 있었다. 이제 한 달 남짓이면 반짝 마음을 들뜨게 했던 전어의 계절도 지나가리라. 하지만 그 자리를 채워줄 대하와 굴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비단 한 필 값이라는 가을 전어를 며느리 친정간 사이에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집 나간 며느리가 기껏 냄새 맡고 돌아와봤자 결국엔 국물도 없다는 건가?에디터의 단골 생선가게 ● 바다가 온다 알고 보니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비롯 다양한 커리어를 가진 사장님의 포스가 장난 아니다. 한번 말을 건네면 조곤조곤 어떤 생선은 언제 어떻게 먹는 게 맛있는지 뭘 곁들이면 좋은지 척척 쏟아져나온다. 영화 제작을 하기도 했던 사장님의 마당발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예인 단골들도 제법 된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건 무엇보다 재료가 싱싱하기 때문이다. 신선한 회부터 구이까지 해산물이라면 종목 구분 없이 적당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특히 2층의 야외 테라스 자리가 명당인데 여름밤엔 반드시 예약해야 차지할 수 있다. TEL 543-8858. ● 대풍 생선구이 잠원동 먹자골목의 터줏대감 같은 곳으로 주말에도 늘 단골손님들로 북적거린다.장사가 잘 되다 보니 자연스레 분점도 냈다. “하나씩 드릴까요?”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물음은 고등어, 삼치구이의 조합을 말한다. 보통 단골들도 다 그렇게 ‘하나씩’ 먹는데 게다가 생선구이가 모자라면 리필까지 된다. 개운한 된장국물의 조합까지 합쳐져 소박하지만 늘 만족스런 한 끼를 보장한다. 아저씨들부터 커플들까지 유난히 단골이 많은 집. TEL 518-7357● 고삼이 홍대 입구 근처에서 깔끔한 밥이 그리울 때 무난하게 기분 좋은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노릇노릇 잘 구워져 나오는 커다란 고등어구이가 맛있고 여기에 해물된장을 곁들이면 궁합이 그만이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메뉴인 매생이국밥도 별미로 좋다. 대학가에 위치한 밥집답게 아기자기 키치하게 꾸며놓은 인테리어도 특색 있다. TEL 334-3792.*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