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의 올 댓 뮤지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2시간 30분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24시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이 여배우는 사실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대 중독자다. 홍조 띤 얼굴로 관객을 기다릴 줄 아는 순수함을 마흔이 넘은 베테랑 배우가 가졌다는 것 또한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0.01퍼센트의 스트레스도 감지되지 않는 이 해피한 배우에게 공감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그녀는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다. :: 열정적인,아티스트,공연,최정원,엘르,뮤지컬,배우,엘라서울,엣진,elle.co.kr :: | :: 열정적인,아티스트,공연,최정원,엘르

에서처럼 누군가가 “질문 참 식상하네요!” 라며 뿅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도 아니건만 내공 있는 인터뷰이를 만날 때면 평소보다 몇 배 더 자료 수집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게 사실이다. 이름 석 자만 치면 줄줄이 검색되는 인터뷰에, 수년 세월을 아우르는 기사와 화보까지, 인터뷰이의 프로필이 방대하고 조밀할수록 인터뷰어의 손은 부산해진다.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대표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 그런 케이스다. 진 켈리가 나오는 뮤지컬영화 을 보고 처음 배우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부터 롯데월드 뮤지컬단에 최연소로 합격했던 사연, 의 ‘6번 아가씨’로 우연히 갖게 된 데뷔 무대까지, 그녀 인생의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한 번씩만 되짚어줘도 지면이 빡빡하게 채워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20년 동안 출연한 스물일곱편의 작품은 또 어떤가. 등 그녀의 근작들은 빠짐없이 챙겨 봤지만 막상 다시 이야기하려니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뮤지컬 의 프레스 리허설을 마치고 가쁜 숨을 고르며 대기실로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이 모든 고민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선 의 페기 소여처럼 상기된 그 얼굴이라니! 말하는 동안에도 쉼 없이 노래를 흥얼대고 몸을 흔들고 감탄사를 내뱉고 가끔은 꿈꾸듯 눈까지 감는 이 배우는 ‘뮤지컬’ 그 자체였고, 전기(傳記) 한편 쓸 요량으로 찾아갔던 에디터는 그 풍성한 표현력에 마음을 뺏겨버린 나머지 그만 ‘관객’으로 포지션을 급선회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파란만장한 이력과 수차례 공개된 바 있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 배우 남경주와의 오랜 인연이라든지 국내 최초로 수중분만에 도전한 일 등 - 은 여기서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 한 여우(女優)의 무대를 향한 내밀하고 뜨거운 사랑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기록이 될 테니.Ensemble : 뮤지컬 “지금 자신 안에 벨마가 몇 퍼센트 정도 남아계세요?” 무대의 흥분을 잔뜩 머금고 대기실로 들어선 최정원에게 나름 신선(!)하다고 생각한 질문을 던졌다. 아찔한 블랙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은 벨마 켈리 상태인 거 같아요.” 갱과 재즈의 시대, 1920년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여자 사형수 록시와 벨마의 이야기를 그린 매혹의 뮤지컬 . 그녀가 맡은 역은 파워풀한 춤과 노래로 무대를 압도하는 보드빌 스타, 벨마 켈리다. 바람 난 남편과 여동생을 죽인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지만 여전히 감방 대장으로 군림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사실 는 최정원에게 있어 여러 모로 각별한 작품이다. 2000년 한국 초연 당시 주인공 ‘록시 하트’ 역으로 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벨마 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까닭이다. 서른두 살에 록시 역으로 시작해 마흔 두 살이 된 지금 벨마를 연기하고 있으니 벌써 10년째 와 인연을 맺고 있는 셈. “본래 배우들은 했던 작품보다 새로운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또한 그렇고요. 하지만 만큼은 달라요. 엉덩이 돌리는 동작 하나, 손가락 움직임 하나도 반복할수록 더 좋아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하면 할수록 농익는 작품이죠. 아무래도 록시 역을 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적을 알고 나를 아는 부분도 있고요.(웃음)” 처음부터 벨마 역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2007년 이 역할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그녀는 “저 아직 록시예요”라며 난색을 표했다. 더 이상 젊고 생기 넘치는 록시를 연기할 수 없다는 데서 온 서운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벨마가 매우 유연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떨 땐 기세등등한 악녀로, 어떨 땐 애교 넘치는 여자로, 2막에 걸쳐 총 여덟 번 등장하는 벨마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일 때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1막과 2막의 오프닝은 물론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도 벨마였다. 특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천천히 무대 위로 등장하는 1막 오프닝은 최정원이 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 관객들의 요란한 환호가 객석을 채우고, 첫 소절 ‘Come on Baby 함께 즐겨봐, and All That Jazz!”가 이어지는 순간, 그녀는 온몸을 휘감는 저릿저릿한 희열과 함께 그대로 벨마 켈리가 되어버린다. 20년 간 다져진 베테랑 배우의 카리스마가 최고로 빛을 발하는 시간이다. “치타 리베라라는 유명한 뮤지컬 배우는 60살까지 벨마로 무대에 섰대요. 안무 선생님인 게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재키(최정원의 영어이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요. 육십이 됐을 때도 멋지게 덤블링하고 무대에서 춤추는 게 소원이에요.”Solo : 뮤지컬배우 최정원한국 뮤지컬 시장을 개척한 1세대 배우로, 가정적인 아내이자 살뜰한 엄마로, 최정원은 다소 모범적인 공인으로만 각인되어온 측면이 있다. 무섭도록 자신을 담금질하는 이 철저한 프로페셔널이 아직까지 ‘독종’으로 불리지 않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게다. 늘 한결같은 사람의 노력은 스포트라이트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같은 노래도 100번 부르면 불안하고 1000번은 불러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그녀는 알고 보면 참 독한 배우다. 컨디션 관리에 쏟는 노력 또한 상상 이상이다. 하루에 7리터의 물을 마시고 술 담배는 일절 하지 않으며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집에서도 틈틈이 몸을 움직이며 체력을 단련한다. 단순히 예쁘게 보이려는 노력이 아닌, 최상의 무대를 만들기 위한 프로 배우로서의 자기관리다. 공연 전날에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나만의 리허설을 갖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내일 이 시간쯤이면 난 무대 아래에서 성호를 긋고 있겠지? 사회자가 퇴장하고, 전주가 나오고, 내가 등장하고… 어어, 안 돼! 더 기다렸다 들어가야지. 그렇지. 허리 꼿꼿하게 펴고, 시선은 당당하게…’ 이렇게 2시간 넘게 상상의 리허설을 끝내고 나면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에너지가 소진된다. 그리고 공연 당일, 최정원은 데뷔 이후 늘 그랬듯 또 한 번 특별한 리허설을 가진다. “저는 남들보다 좀 일찍 공연장에 가는 편이에요. 스태프가 오기 전에요.(웃음) 신발을 벗고 무대에 올라가 그날 제가 밟을 동선을 차례로 밟아 봐요. 미친 사람처럼 중얼중얼 혼자 대사도 쳐보고요. 그러다 보면 뮤지컬이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앙상블 작업임을 알 수 있어요. 그렇게 한차례 리허설이 끝나면 무대 위에 가만히 누워서 곧 이곳을 가득 메울 관객들을 상상하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인 습관인데 굉장히 재미있어요.” 최정원의 이 모든 행동은 단언컨대 관객, 오로지 관객을 위함이다. 뮤지컬의 드라마틱한 성장을 똑똑히 지켜봐온 그녀는 관객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배우. 공연을 보기 위해 약속을 잡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자신의 의지로 찾아온 관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단다. 자신이 관객의 박수에서 느끼는 희열만큼 관객 역시 자신의 무대에서 똑같은 양의 희열을 느끼고 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계산법이다. “저한테는 관객들의 박수가 힘이고 무대가 생명이에요. 노래 잘하고 얼굴 예쁜 배우는 많겠지만 저처럼 죽을 만큼 뮤지컬을 사랑하는 여자는 아마 없을 걸요? 저는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무대에 서요. 이 작품 끝내고 갑자기 사고로 죽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사력을 다해 무대에 임하게 돼요.”Duet : 아내 그리고 엄마‘외조의 왕’ 남편과 열 두 살 난 딸 수아는 박수 한 점 없는 지루한 연습장에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유일한 관객이다. 예전에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그런 죄책감은 툭툭 털어버리게 됐다고. 벌써부터 엄마의 끼를 물려받아 가수를 준비하고 있는 수아는 누구보다 먼저 엄마의 무대를 챙겨 보는 열혈 팬이다. “를 제일 좋아해요. 제가 소피한테 웨딩드레스 입혀주고 머리 빗겨주는 장면이 나오면 늘 울어요. 엄마 그거 나한테 부르는 거지, 이러면서.(웃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수아가 소피를, 제가 엄마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하나의 배역이 끝나면 그녀는 서둘러 자신을 비워내기 바쁘다. 몸 안에 남아있는 캐릭터를 지우고 일상의 아내이자 엄마로 돌아오기 위함이다. 그녀가 비움의 수단으로 즐겨 쓰는 것은 여행. 배우 이전에 관객이라는 생각에 웨스트앤드와 브로드웨이를 특히 자주 간다. 문득 그녀가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앤드에서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몇 년째 정상을 지키고 있는 최정원에게 한국 땅이 좁게 느껴진 적은 없었을까. “전혀요. 저는 사람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사랑하는 가족, 동료들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건데 그들이 없다면 뮤지컬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제 아무리 억만금을 준대도 혼자 외국 가서 공연하라고 하면 전 안갈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통하지도 않는 말로 공연하면서 스타가 되고 싶진 않아요. 손 뻗으면 닿을 수 사람들이 있는 이곳이 좋습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처음을 언제나처럼. 소주 광고 문구가 아니다. 1989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잊지 않고 사수해온 마법의 아포리즘이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성호를 긋고 반드시 이 주문을 되뇐다고 했다. 최정원의 10년 치 인터뷰 자료를 모으면서 느낀 것은 어느 기사를 봐도 그녀가 늘 ‘처음처럼’ 한결 같다는 것이다. 흔해빠진 격언도 주인을 제대로 만나면 운명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2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