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패션 센스의 적정선

얼마나 표현하고 어디까지 아는 척 해야 매력적일까? 남자가 가져야하는 패션 센스의 적당한 수위를 생각해 봤다.

프로필 by ELLE 2010.07.02

시작은 1년만에 만난 후배의 연애 상담이었다. “정말 괜찮은 친구 같아요. 성격 잘 맞고, 전망 좋은 직업에 집안 끼리도 아는 사이고. 결혼까지 고민 중이긴 한데, 결정적으로 스타일이 별로야. 못생기거나 몸매가 꽝인건 아닌데 쇼핑하고 스타일링 하는데 투자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나마 바나나 리퍼블릭 옷만 입어서 깔끔하긴 한데 매력이 없어. 근데 선배 양말 색깔은 왜 이래?” “이탤리언 트위스트라고 몰라? 오늘 무난한 블랙과 네이비 옷을 입어서 라이트 퍼플 컬러로 액센트를 준거야. 참, 뭐라고 했지? 남자 친구 스타일이 이상해? 그럼 니가 바꿔주면 되잖아. 잘 가르쳐서 패션 센스도 좀 키워주고.” “그러다 너무 멋부리고 나보다 패션에 훤해지면 어떡해. 남자 친구가 나보다 패셔너블해지는 건 싫다고. 왠만한 여자들 다 나 같이 생각할걸? 적당히 스타일 괜찮고 약간 센스 있는 정도가 좋지.”
직업적인 이유로 에디터를 열외시킨다곤 했지만 어쨌든 패션에 너무 정통한 남자는 매력없다는 말에 흠칫 놀란 건 사실이다. 태연한 척 그 이유를 자세히 따졌더니 남자의 패션 센스가 너무 과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었다. 자신도 잘 모르는 디자이너의 이름과 패션 용어를 줄줄 꿰고 있을 때, 국내외 유명 편집 매장 정보에 세일 기간까지 정통할 때, 자신은 못 사서 안달인 명품을 너무 많이 갖고 있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매너 좋은 척 하면서 여자의 패션이나 스타일의 단점을 짚어낼 때. 하나하나 언급할 때마다 속이 뜨끔한 것은 둘째치고 매달 <루엘>을 통해 설파한 패션 정보들이 잘못하면 남자를 매력없게 만드는 단초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물론 매력적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선 현명한 쇼핑을 하고 아이템을 적절히 매치하는 건 기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많은 정보가 필요한 게 기정 사실이다. 문제는 그렇게 길러진 패션 센스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때는 적당히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알면서 모르는척, 면밀히 준비했으면서 우연히 그렇게 된 척, 그게 바로 패션 센스에 대한 남자의 적정선이라는 얘기다.





몇 가지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이렇다. 디자이너의 이름은 유명 패션 하우스를 이끌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몇 명 정도만(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질 샌더의 라프 시몬스면 충분하다) 아는 척하고, 현재 아무리 ‘핫‘ 하더라도 발음조차 어려운 이름(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발망의 크리스토프 테카르냉,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등)은 굳이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요즘 여자들이 환장하는 파워 숄더 재킷을 보고 ‘80년대 트렌드를 리바이벌한 발맹 재킷이네’라고 말하지 말고 ‘마돈나가 한창 인기있던 때 많이 보던 재킷이구나’ 라고 돌려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닐 바렛의 그레이 캐시미어 크롬비 코트를 벼르고 별러 압구정동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세일가로 샀다는 자랑도 금물이다. 누가 ‘코트 참 멋지네요. 어디서 사셨어요?’라고 물으면 ‘아, 이거요? 압구정동 지나다 인테리어가 괜찮아 보이는 매장이 있어서 들어갔다 샀어요. 맞아요, 브랜드가 닐 바렛이라더군요’ 라고 얘기해야 브랜드에 환장한 남자가 아니라 세련된 감각을 가진 사람으로 어필할 수 있다. 민망할 정도로 화려한 백과 하이힐을 신고 ‘나 이거 새로 샀는데 어때?’라고 물으면 ‘잘 골랐어. 당신은 분위기가 세련되니 심플한 스타일도 괜찮을 거야. 미니멀한 스타일로 유명한 브랜드가 뭐였지? 그래, 질 샌더’ 라는 선의의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반대편에선 이런 고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서 산 옷이고, 관심이 있어 알게된 정보를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민. 그러니까 남자에게 필요한 패션 센스의 적정선은 과연 어디일까, 라는 고민. 그런 고민이 극에 달했던 얼마 전, 시선을 잡아 끄는 사진 한 컷을 발견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탁월한 실력 만큼이나 세련된 스타일로 정평이 난 미국 의 남성 패션 디렉터 브루스 패스크. 파리의 패션쇼장에서 완벽에 가까운 그의 스타일에 매료되어 포착한 순간이었다. 그레이 컬러, 샴브레 셔츠, 볼륨감 있는 보타이, 데져트 부츠에 빈티지 롤렉스까지. 2009년 후반기 남성 패션의 모든 이슈가 녹아있었다. 꼼꼼히 따져보면 세심하게 짜 맞춘것 같지만 그는 한없이 자연스럽고 과하지 않아 보였다. 패션 에디터들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씩은 꼭 챙기는 이번 시즌의 잇 백을 절대 들지 않고, 늘 몰스킨의 블랙 다이어리만 들고 다니는 것 또한 멋졌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입고 신은 아이템은 항상 좋아보이지만 아무리봐도 어떤 브랜드의 것인지 파악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매력은 뒤에 앉은 일본 프레스와 대조를 이뤄 더욱 부각되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는 이번 시즌 꼼 데 가르송의 핑크 카디건과 비비안 웨스트 우드의 플라워 프린트 팬츠는 시선을 끌고 개성이 돋보이긴 하지만 무난한 그레이 카디건에 빈티지 데님 팬츠를 입은 브루스에 비하면 매력이 떨어져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스타일을 연출할 때나 다양한 경로로 패션 센스를 표현할 때, 드러냄과 감춤의 경계를 잘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일단 그 판단 기준으로 브루스의 그레이 카디건과 일본 프레스의 핑크 카디건을 상정하는 건 어떨까. 



* 자세한 내용은 루엘 본지 1월호를 참고하세요!

Credit

  • EDITOR MIN BYUNG JOON
  • PHOTOGRAPHER KO YONG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