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패션지는 최첨단 패션 문화를 이끄는 우아한 문화예술지인가? 혹은 '된장녀들이 읽는 시답잖은 종이 쪼가리'인 걸까. 패션지를 보는 자, 보지 않는 자, 만드는 자. 서로 다른 뷰를 지닌 여섯 명의 필자에게 물었다. "패션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개성있는, 독특한, 참신한, 다능한, 집, 카페, 서점, 일상, 휴식, 여가, 독서, 도서, 잡지, 엘르, 엘르걸, 엣진, elle.co.kr:: | ::개성있는,독특한,참신한,다능한,집

패션가의 기적을 기다리며요즘 로 상한가를 기록 중인 윤제균 감독이 2년 전 만든 영화 이 있다. 최근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원껏 울었다. 착한 사람들은 왜 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은 왜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을까? “아빠가 많이 미안해, 잘 해줄려고 하는데, 잘 안돼.” 하지원이 동양 챔피언에 실패하고, 같은 시간에 음독자살로 숨이 끊어진 아버지가 영혼이 되어서 딸에게 해준 얘기이다. 왜 우리는 만날 지고, 결국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지? 다행히도 영화 속 철거민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서, 하지원은 그토록 원하던 동양 챔피언이 되고 가난한 어린 남매는 도망간 엄마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 기적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안 되는 걸까? 행복한 듯한 삶은 패션지 한구석에 판타지처럼만 있는 걸까? 패션지는 패션에 속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잡지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패션은 여전히 영광스럽지만, 잡지는 과연 살아서 또 다른 10년을 넘어갈지 의심스러운 종이 문화에 속한 것이다. 패션에 속한 사람들은 비교적 넉넉해 보이지만, 잡지에 속한 사람들은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의 패션지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 아직 넉넉한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고, 미용실이나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패션지를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판타지를 다루는 셈이다. 그래서 패션지의 세계에는 생각보다 슬픔이 많아 보였다. 동시에 패션지는 최소한 네 가지 종류의 다른 부류의 경제적 주체들이 만나는 사거리와 같은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우선은 독자들인 소비자들의 눈이 있고, 여기에 수많은 의상과 소품들을 만들어내는 생산자의 눈이 있고, 이 두 집단을 만나게 해주는 유통의 눈이 있다. 그리고 비록 소수이겠지만 옷을 잘 입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경제 영역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패션 리더들의 눈이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집단의 총성 없는 경쟁을 우아함으로 마무리하는 에디터들의 세계가 있다. 문화가 움직이고, 돈이 움직이고, 마케팅이 움직이고, 디자이너들의 로망이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패션지의 세계일 것이다.나는 왜 패션지를 보는가? 무엇보다 시대를 읽고 싶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자본론’보다 더 첨단에서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현실이 있고, 새롭게 전환되는 마케팅 사회의 본질을 때때로 그 안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재미있어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사회의 절반을 모르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서이다. 그러나 외국 패션지와 달리 라이선스로 제작되는 한국의 패션지에는 어쩐지 우리가 사는 사회의 팽팽한 긴장감과 그 삶의 애환이 잘 느껴지지는 않는다. 파리 에는 파리가 온전히 담겨 있고 프랑스 전체가 담겨 있는 듯하지만, 한국의 라이선스 버전 패션지에는 청담동만이 숨 쉬는 듯하다. 그래서 아주 가끔이지만, 여전히 내가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고, 한때 동경보다 한성이 놀기에 더 좋았다고 말하는 1920~30년대 일본의 문화 청년들의 넋두리를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어떤 식으로든 좋다. 나는 여전히 한국 패션지에서 ‘패션가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지혜로운 소비자, 독창적인 생산자, 문화 아방가르드를 후원하는 유통 혹은 사회 변화를 맨 앞에서 이끌어가는 혁명적인 패션 리더, 그런 것들이 등장할 가능성은 아예 없을까? 나는 한국의 패션지에 대한 작은 소망들을 담으면서, 여전히 한구석에 작게라도 기적의 싹이 트기를 바라며, 패션지를 사서 조그마한 기사들까지 읽으려 한다. 아직까지 그런 일들이 잘 벌어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어지간해서 지치지 않는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지났는데, 지난 10년 동안 외국의 패션쇼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10년 전에는 패션쇼 앞자리에 할머니들과 활동적인 아주머니들이 많이 앉아 있었는데, 요즘은 수트 차림의 아저씨들이 앉아 있는 것을 종종 본다. 디자이너나 에디터들이 아니라, 돈을 쥐고 있는 투자자들이 패션쇼 앞자리에 있는 것은, 글로벌 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변하게 된 생산의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매종’이라고 표현되는 마에스트로형 가족 기업이 버티기 어렵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 그 대신 자연의 시대를 반영하는 생태 코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 변화 속에서 여전히 나는 다음 10년의 ‘패션가의 기적’을 기다린다. 우석훈?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강사 패션지는 무엇으로 사는가‘오버’하는 것 같지만 진심이다. 10년 이상 패션 매거진을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잡지에서 배웠다. 어렸을 적 외국으로 출장 갔다 돌아오신 아버지가 비행기에서 가져오신 기내 여행지에서 파리 센 강의 야경을 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파리에 가보리라’ 결심했고,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패션지인 미국판(1985년 3월호였던 걸로 기억한다)을 보고 받았던 충격과 놀라움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신세계를 발견했던 콜럼버스가 그런 마음이었을까. 아주 꼬마 때부터 패션과 그림을 동경하고 좋아했으나 사실 그 원인이 ‘잡지’였다는 것은 오히려 성인이 되고 에디터가 된 다음에 돌이켜보고 난 후의 깨달음이었다. 물론 잡지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잡지쟁이’가 된 이후부터는 매달 잡지 한 권을 만들어야 하는 고된(그러나 동시에 행복하기도 한!) 노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애정’에서 ‘애증’으로 변하긴 했으나, 여전히 잡지는 나에겐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모든 분야의 매거진이 사람들의 생활에 영감과 감성, 정보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패션 매거진은 가장 ‘화려한 전달자’이다. 그래서인지 패션지는 다른 잡지가 해주기 어려운 것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꿈’과 ‘판타지’를 전달하는 것은 아마 패션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살면서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정보 전달 미디어는 폭발적으로 늘어만 간다. 형태나 전달 방식도 너무나 다양화되어가기 때문에 요즘엔 마치 정보라는 공기에 둘러싸여 숨 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 ‘정보’라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가치는 저평가될 수밖에 없고, 그중에서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 즉 꿈과 판타지가 아니겠는가. 그것을 시각화하여 눈에 보이게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무나’ 못 하는 일임이 분명하며 그것이 바로 패션지가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홀로그램이 나타나 말을 걸고 입어보고 싶은 옷의 촉감도 모니터를 만지면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코앞에 있다고 해도, 그래서 패션지도 분명 그 겉모습은 좀 변신해야 한다고 해도, 아마 ‘꿈’과 ‘판타지’를 전달해주는 그 미션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시사 잡지, 영화 잡지가 100% 디지털화되는 날이 와도 패션지는 분명 살아남지 않을까. 패션지가 전달하는 비주얼 판타지는 분명 ‘소장’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감도 있는 비주얼 그 자체 때문이다. 도저히 디지털 텍스트화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감도 있는 비주얼이 존재하는 한 패션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 ‘위대한’ 패션지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패션지, 당신 스스로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하다 해도 분명 독자에게 정보와 판타지를 전달하는 ‘소박한’ 우체부의 마음만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패션지의 권위는 절대 그들 스스로가 쌓아놓고 으스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쌓아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강주연? 부편집장, ELLE atTV 편집장 패션지에는 좌우가 없다 김제동은 웃음에는 좌우가 없다고 말했다. 전직 패션지 ‘피처 에디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여기에 패션지의 존재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패션지에는 좌우가 없다. 좌우를 나누지도, 좌우를 버리지도 않는다. 이미지로든, 글로든, 동영상으로든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미디어는 어떤 입장을 정치하게 고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패션지는 그 모두의 입장을 일단 경청한 뒤, 그 목소리를 독자에게 ‘다양하게’ 들려주는 데 자원을 소비한다. 전방위적인 오지랖을 자랑하는 패션지는 잡다하고, 수다하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안에 대해 안테나를 뻗치고 있다. 좌우가 없다 보니 못 할 말, 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게 된 패션지는 대한민국에서 명실공히 가장 진보적인 매체다.패션지가 진보적이라고? 혹자는 내게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첨병 노릇을 하며, 포토샵의 돌려 깎기를 자행하며 말라깽이 모델을 선전하고, 여자들에게 시즌별로 성형수술을 업데이트하며, 동물 가죽을 벗겨 전시하는 도무지 친환경주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 불온한 ‘허영 덩어리’가 진보적이라고? 탐탁지는 않지만, 그렇다.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다. 좌우 구분이 없어 영혼이 자유로운 에디터들이 다달이 ‘씹힐’ 게 뻔한 기사를 쓰기 위해 한 달 열흘 밤을 새워가며 고군분투한 덕이다. 스물일곱의 여자가 세 살 어려 보이기 위해 어떤 프티 성형을 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패션지의 의무이고, 그런 성형이 결코 여자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서늘한 충고를 나란히 싣는 것도 패션지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양립할 수 없는 삶의 두 가지 욕망, 즉 나답고자 하는 것과 세상이 원하는 가치에 휘말리는 것. 그 서글픈 모순을 패션지는 고스란히 드러낸다. 좌우가 없다는 건 이렇게 리얼한 거다. 그리고 그 리얼함을 담기 위해 패션지의 에디터들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자신을 치열하게 들볶는다. 증언하건대 대한민국 패션지 에디터들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자기 기사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에디터들의 열정은 패션지의 ‘다양성’을 존재케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내가 아는 한 패션지의 에디터들은 한 페이지 기사를 쓰기 위해 다섯 명의 취재원과 만나고, 매달 열 꼭지의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고, 관련 서적을 ‘공부하듯’ 읽는다. 어떤 에디터들은 하나의 메시지를 지면을 통해 도출하기 위해 자신의 상사와 힘겨운 투쟁을 하고, 좋은 기사가 나올 때까지 외부 필자와 데드라인까지 신경전을 벌이며 기사 수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에디터들을 가장 맥 빠지게 하는 것은 사이코 상사도, 임금 동결도, 지긋지긋한 야근도 아니다. “네 기사 아무도 안 읽는다. 패션지 만드는 데 뭘 그리 애를 쓰시나?” 패션지 에디터들끼리 ‘너무 애쓰지 말라’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통용되는 이 언설은, 대한민국 패션지의 위치, 즉 현실을 정확히 말해준다. 여기에 패션지의 존재론을 넘어선 그 어떤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패션지란 다양성을 고루 반영하든,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든, 가장 진보적인 매체이든, 에디터들이 자기 기사에 목숨을 걸든 어떤 사람에겐 ‘된장녀들이 보는 시답잖은 종이 쪼가리’인 셈이다.한때 패션지 내부 사람으로서 나는 그 사실이 언짢고, 불편하다. 패션지와 독자 사이의 이 오해 아닌 오해를 풀지 않는 한, 패션지(그리고 에디터들)는 계속 그 어떤 억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패션지 외부인이 된 ‘독자’의 입장에서 같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좌우 구분 없는, 그래서 어쩌면 너무도 모순적인 이 한 권의 잡지를 매달 정독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충실한 독자가 노련한 코멘트(악플이라 할지라도!)로 패션지에 정식 노크하는 순간, 아마도 대한민국의 패션지는 진짜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결국 패션지의 존재는 내부보다 외부가 결정짓는 것이라고 말이다.김윤경?독립 칼럼니스트, 저자 30대 남자 소설가가 패션지를 보는 이유패션지와는 이래저래 인연이 닿아서 칼럼을 쓰다 보니 가끔 잡지가 배달되어 온다. 물론 맨 처음 펼쳐보는 건 내 글이 실린 페이지다. 패션지에는 가끔씩 패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글이 필요한 것 같다(이 원고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는 그달의 피처 기사를 읽어보고, 사진과 광고를 감상한다. 순진한 공학도(?) 출신이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웹디자인 잡지 등은 업계 동향이나 새로운 기술을 소개한다. 보는 사람들도 동종 업계다. 패션지도 전문 잡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다(모든 사람은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그러나 패션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굉장히 전문적이다. 독자층이 젊은 여성이라고 한정한다 하더라도 전문적인 기사들 (패션 디자이너 인터뷰, 트렌드 분석 등)을 읽고 있노라면 ‘설마 이런 걸 꼼꼼히 다 읽고 옷을 사는 데 참고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들의 속셈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미용실에서 잡지를 펼쳐보는 여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다른 이야기 하나.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내는 심심할 때마다 백화점에 간다. 집에서 글을 쓰다 보니 엉겁결에 따라나설 때가 많다. 다양한 옷의 종류도 그렇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보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수많은 옷 중 이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이 브랜드의 옷이 에스닉하지만 보헤미안 스타일을 가미하면 좋겠다느니 같은 말에 몇 번 고개를 끄덕여주지만 나는 대형 서점에나 가서 죽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살 것도 아니면서 왜 구경을 하지?” 아내는 백화점에서 옷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해본다. “뭐야? 백화점 손님 중에 진짜 옷을 사러 온 사람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 아내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과 결혼했다니 믿을 수 없어’라는 표정이다. “안목을 기르는 거야. 동대문에서 옷을 사더라도 어떤 게 유행인지는 알아야지. 그리고 그 방면의 최고 옷을 구경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맞다. 그러면 나는 옷 대신에 애플 스토어에서 최신 아이팟을 구경하고 싶다. 당장 살 건 아니지만 새로 나온 노트북과 아이팟, 헤드폰을 구경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샛길로 빠지는 게 내 장기다). 외국의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프로젝트 런웨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옷이 만들어지는 각 과정이다. 어떨 때 보면 그들은 예술품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실용품을 만드는 것 같기도, 발명품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이 만드는 옷을 보면 개개인의 성격과 재능에 따라 지루하기도, 기발하기도, 엉망이기도 하다. 심사위원인 니나 가르시아는 언제나 쌀쌀맞은 평가로 참가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여기서 탈락자는 운이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재능 때문에 떨어진다. 이 쇼를 보면서 패션계의 프로페셔널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야기가 샛길로 너무 많이 빠지기 전에 원점으로 돌아오자. 패션지는 왜 존재하는가? 패션지의 존재 이유는 패션의 존재 이유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멋대로 내려본다. 옷은 실용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예술이다. 옷을 만드는 것은 프로페셔널한 일이지만 그걸 입고 평가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몫이다. 패션지도 마찬가지다. 실용적이면서도 (원고를 의뢰받고 을 뒤적여보니 거의 소녀들의 교과서 수준 아닌가!)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화보와 광고까지).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만든 전문 잡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 심지어 패션에 전혀 관심 없는 30대 중반의 소설가 남자도 말이다. 서진?소설가 패션지, 환상과 진실성 사이 20대 여성들에게 패션지는 하나의 선망의 대상이다. 패션지에 소개되는 고가의 스타일리시한 아이템들, V라인 얼굴과 S라인 몸매를 지닌 모델들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몇백만 원이나 하는 제품을 척척 구입할 능력은 없지만, 죽어라 다이어트를 해도 그 몸매를 가질 순 없지만, 패션지를 보면서 세련된 감각을 익히고 ‘나’를 가꾸고자 마음먹는다. 그러나 패션지도 책이냐며, 무라카미 하루키나 파울로 코엘류 정도는 읽어줘야 수준 있는 거라며 잡지 보는 여자들을 머리가 텅 빈 ‘된장녀’로 취급하는 남자들도 있다. 이같이 무례한 생각은 ‘패션’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의(衣)’의 개념으로만 해석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위에 언급된 작가들의 인터뷰가 바로 패션지에 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턱이 없다). 패션의 개념은 음악, 예술, 정치 등을 아우르며, 패션은 미학과 혁신의 틈에 있는 것이다(라고 위키피디아도 말한다). 나 역시 중학교 시절부터 잡지를 즐겨 보며 자랐다. 부록에 혹해서 한 달에 2~3권씩 서로 다른 잡지를 사기도 했고, 예쁜 화보들은 찢어서 벽에 붙이거나 편지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 즐겨 보던 영 패션지에는 이요원, 배두나, 공효진, 김민희 등 국내 10대 모델들(재미있게도 현재는 모두 주목받는 여배우가 되었다)이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해외 라이선스 패션지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세계 패션 트렌드와 할리우드 스타들의 스타일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많아졌다. 현실적이고 친근한 정보는 줄었지만, 잡지가 제공하는 판타지의 세계는 더욱 깊어졌다. 얼마 전 20대 여대생들에게 자신들의 스타일 아이콘이 누구냐고 묻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중 90%가 시에나 밀러,린제이 로한, 케이트 모스 등 해외 패셔니스타들을 꼽았다. 물론 글로벌 시대의 당연한 추세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의 매달 이들의 스타일링 팁과 화보를 싣고 있는 라이선스 패션지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예이기도 하다. 요즘 나는 패션지 애독자의 신분을 넘어, 캠퍼스 패션 매거진 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앞서 말했듯 기성 잡지들이 판타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만드는 는 대학생들에게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숍, 합리적인 가격으로도 패션 피플이 될 수 있는 스타일링 팁, 주변의 스타일리시한 친구들과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막상 편집장이 돼서 직접 잡지를 만들어보니 기획에서부터 에디터들 관리까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러 사람의 땀과 열정이 모여 한 권의 잡지가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패션지를 함부로 폄훼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와 드라마 등을 통해 일반인들의 패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편이다. 물론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에지 있게!’를 외치며 에디터들을 닦달하는 히스테릭한 편집장은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편집장에 대한 이 우스꽝스러운 묘사는 바로 패션과 패션지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인식과 일맥상통하고 있지 않을까. 패션의 세계를 ‘과장되고 허황된’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 잘못됐지만,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게 된 데는 화려한 환상을 팔기에만 급급한 패션지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나는 패션지가 패션의 화려한 이면에 숨겨진 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그들의 ‘진실성’에 대해 좀 더 알려주었으면 한다. 더욱이 패션지가 이 시대의 (나를 포함한) 여성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면 말이다. 김지숙?고려대학교 환경생태공학부, 캠퍼스 패션 매거진 편집장 한국 패션지의 모호한 아이덴티티내가 처음으로 본 패션지를 떠올려봤다. , , 같은 여성지들도 패션지의 범주에 넣는다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봤다. 어머니, 누나가 보던 여성지들을 몰래몰래 들쳐봤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보던 여성지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정보들이 가득 들어 있는 보물섬이었다. 당시 만화잡지와 함께 여성지는 나의 필독 잡지였다. 그 후로 나는 잡지라는 매체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었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있으면 꽤나 즐겁고 가끔 인생에 도움도 되는 존재로서. 그리고 패션지도 보게 되었다. 기존의 여성지와는 달리, 조금 더 ‘패션’과 ‘문화’에 초점을 맞춘 잡지로서., , 등 패션지의 종류는 무수하게 많다. 아마 특정 영역의 잡지로서는 가장 많을 것이다. 대체 왜? 각설하고, 두말할 것도 없이 패션지는 필요하다. 현대사회에서 패션은 대단히 중요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왜 중요하냐고? 당신들이 입는 모든 것, 아니 당신이 세상에서 사고 먹고 등등 일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패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옷을 살 때만이 아니라 ‘어떤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실 것인가’,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들을 것인가’에도 꽤나 노골적으로 패션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취향을 결정짓는 것은, 패션이라는 말로 좀 심하게 뭉뚱그릴 수도 있는 갖가지 디자인과 태도 같은 것들이다.좀 거창하게 말하면, 패션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지’(?) 있는 것을 들려준다. 이것을 입으면 당신이 좀 더 우아하거나 섹시하게 보이고, 이것을 사면 당신은 좀 더 품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그것은 당연히 소비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수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들이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나의 애티튜드와 패션을 선택할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왜곡되었다 해도, 그것은 근원을 따질 일이지 결코 패션이나 소비를 탓할 일은 아니다. 패션은 드러난 자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패션지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결정짓는 것에, 아니 사실은 나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데에 ‘패션’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패션지는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지금 한국의 패션지가 과연 그러한가이다. 나는 패션지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패션지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가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각자가 주장할 수는 있다. 우리 잡지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대중이, 독자가 어떻게 보는가이다. 한국의 패션지 독자 상당수는 부록에 따라서 무엇을 살 것인지 선택한다. 혹은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해외 잡지의 라이선스를, 그 명성에 기대어 선택한다. 독자가 보기에 패션지 간의 차이는 그다지 없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지 않은가. 와 가 세계적으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패션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가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꼭 글을 쓰거나 인터뷰하고 싶어 하는 잡지인 것을 독자들은 알까? 과 가 새로운 세대의 문화와 트렌드를 가장 ‘핫’하게 전하는 잡지라는 것은? 가 유럽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패션지로서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잡지들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독자적인 콘텐츠로 독자를 확보한 패션지들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다 똑같다. 거의 똑같은 연예인과 패션 그리고 잡다한 상품 등을 저마다 약간씩 다른 화보나 어깨에 잔뜩 힘준 썰(?)로 차별화하는 정도다. 독자가 보기엔, 부록 말고 패션지들의 차별성은 거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말하는 패션은 그저 옷의 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패션은 인간에게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문화예술의 형태다. 신경 써서 문화예술을 찾아다니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패션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소비하게 한다. 우리의 일상 자체가 패션의 지배를 받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패션지도 좀 더 드라마틱해져야 한다. 패션지라고 해서, 신상품 소개나 뜨는 연예인 인터뷰와 화보만으로 일관하는 것은 한심하다. 이 세계에 산재해 있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패션’을 들려달란 말이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그 매체만의 목소리와 시선으로. 김봉석?문화평론가, 컬처 매거진 편집장* 자세한 내용은 엘르걸 본지 1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