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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몸매지만 자연스레 우러나는 강단과 고집.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어쩐지 세상 누구도 쉽게 품 안에 가둘 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발렌시아가 블루종이긴 하지만 대충 아무 옷이나 걸치고 집 근처 거리를 활보하는 양 무심하기만 한 샬롯 갱스부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드는 생각. ‘아, 시크하다.’ 이제는 빛이 바래 말라 비틀어져가는 이 단어가, 그녀에게만은 자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샬롯 갱스부르는 이른바 ‘프렌치 시크’의 아이콘이다. 한국적이라는 말이 그렇듯 프랑스적이라는 것 또한 지금도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이지만 사실 프랑스만큼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강렬한 곳도 없다. 어차피 국가 이미지라는 건 각각의 매력적인 개인과 마주하면 사라지는 거대한 허상이지만 그래서 프렌치 시크라는 명명 속엔 평소 우리가 지니고 있는 프랑스와 파리지앵에 대한 이미지가 여지없이 투영된다. 언제든 좋은 걸 좋다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고는 돌아설 것 같은 단호함, 자유로움, 결코 누구와도 닮지 않은 매력. 정의가 불분명한 프렌치 시크라는 찬사의 가장 주요한 포인트는 개성과 창의성이다. 단순히 브랜드에 안달하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조급함이 아니라 전체적인 스타일과 분위기의 문제다. 그걸 알기에 모두들 그런 수식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기하게도 ‘프랑스적’이라는 수식이 붙은 다른 것 또한 그러하다.
요리도 예외는 아니다. 거리의 작은 레스토랑 점심조차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로 먹는 것이 일상인 나라. 주방 안에선 팀을 이뤄 일사 분란하게 과학적으로 움직이며, 무엇보다 메뉴 선택과 개발에 있어 셰프의 창의성과 개성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엔 여기에 한 가지 더 특별한 요소가 있다. 바로 오랜 전통이자 문화유산으로 내려져오는 적당한 격식과 어느 음식이든 간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축제처럼 즐길 줄 아는 이들이 만들어낸 분위기다. 프랑스인들이 유난히 요리를 사랑하고 맛을 즐기는 오랜 전통을 지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프랑스 출장에서 돌아오면 늘 체중이 는다. 2kg는 기본인데 썩 억울하진 않다. 매일 저녁이면 기본 두 시간씩 이야기를 나눴으니 체류 중에 먹어 치운 걸 곰곰이 떠올리다 보면 오히려 2kg에 머무른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니 말이다. 기꺼이 먹는 걸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살고 있지만 사실 프랑스 음식에 특별히 꽂혀 있는 건 아니다. 평소 개인적인 음식 취향과 궁합으로만 치자면 역시 한식과 일식이 그만이고, 다양성으로 치자면 중식이, 색다른 맛과 향으로 치자면 오히려 인도나 태국 음식이 더 확실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긴 하다. 하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맞는 첫 번째 생일에, 크리스마스에,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작정하고 뭔가 근사한 음식과 추억을 만들고 싶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프랑스식 정찬이다. 거나하게 취하는 대신 식전 빵이나 아뮤즈 부쉬부터 마지막 에스프레소 한 잔까지, 코스든 개별 요리든 다양한 음식에 취해(물론 대부분 반주까지 곁들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오붓한 수다가 제일 어울려서다. 역시, 프랑스 음식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IN THE KITCHEN “사실 별다른 레서피가 있는 건 아니다. 35년 이상 요리를 해보니, 음식이란 건 기존의 원칙만 지키려 하면 지겨워지더라. 영혼이 살아 있는 음식, 영화를 찍듯 즉각적인 면이 가미된 요리를 선보이고 싶다.” 지난달 한식 세계화 캠페인의 하나인 <어메이징 코리안 테이블> 행사로 서울을 찾은 피에르 가니에르의 말이다. 하이엔드로 갈수록 더더욱 그렇지만 이미 재료로 요리의 국적을 가르는 시대도 지났거니와 어느 나라 음식을 더 우위로 치느냐도 의미 없는 구분이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라 구분되는 것들은 대체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그 하나가 공동으로 팀을 이뤄 요리를 하며 그 안에서 셰프의 창의력이 가장 중요한 판가름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주문 하나에도 소스를 만드는 이가 따로 있고, 생선을 만들거나 고기를 굽는 사람, 가니시를 하는 사람이 모두 따로 혹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주방에서 특히 팀워크가 강조된다. 프랑스 내에선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쇠고기가 없고 대신 해산물이나 송아지, 양, 오리, 토끼 등 다른 고기들을 많이 쓰는 편이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쇠고기는 좋은 고기를 구하기만 하면 일반 카페나 비스트로에서도 워낙 잘하는 곳이 많은 탓에 좀 더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기 위한 셰프들의 욕심이 작용해서다. 그에 비해 조리법이나 재료의 궁합에 따라 달라지는 오리나 닭 가슴살 등은 자주 등장하는 재료들. 하지만 식재료에 대한 어려움은 셰프들이 자주 토로하는 주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용도에 맞는 식재료나 부위를 유통한다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 하이엔드를 지향할수록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하고, 요즘엔 채집 레스토랑이라는 모토를 걸고 직접 생산자와 접촉해 내가 지금 먹고 있는 나물이 어디에서 온 건지, 감자는 누가 어느 밭에서 경작한 것인지 마치 와인처럼 모든 생산 구조를 투명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럴 경우 일단 단가가 너무 올라간다. 최고급 하이엔드 레스토랑만이 할 수 있는 시도고, 이런 곳을 이용할 수 있는 고객의 숫자도 한정되기 마련이다.
“어떤 날은 봉골레 파스타가 땡기는 날이 있고, 또 어떤 날은 피자가 먹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또 어떤 날은 비가 오니까 어느 곳의 김치찌개나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거나, 사람마다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아직 프랑스 요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 정서 안에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했단 느낌이 들어요. 다음 세대라면 모를까 아직까진 대부분 그런 향수가 없어요. 반짝 사람들의 뇌리에 프랑스 요리가 파고 드는 때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정도죠. 사실 장사가 잘 되려면 ‘아, 그 집의 뭐가 먹고 싶어’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라야 성공하는 거잖아요.” 이태원 프렌치 브라슬리 봉에보의 셰프인 이형준은 서울에서 프랑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썩 팔리는 아이템은 아니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어느 요리나 재료를 구하는 게 관건이지만 한 가지 메뉴에 집중할 수 있는 다른 레스토랑에 비해 적당히 메뉴 라인업을 갖춰야 하는 프랑스 요리라는 범주는 유난히 기초 조건을 탄탄하게 갖춰야 하는 편이다. 굳이 전문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쉽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워낙 프랑스 식당 자체가 서울만 해도 몇 군데 되지 않고, 화려하게 오픈했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요리의 성격이 불분명할 정도로 메뉴가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다. 좀 괜찮다 싶으면 1, 2년 후 아예 문을 닫아 아쉬워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비단 프랑스 요리 전문점의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맛에 있어선 모험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 달착지근하면서 약간 시큼한 맛이 가미된, 그래서 한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입맛에 평균치를 내는 일 자체가 어렵긴 하지만 누가 먹어도 맛있을 수 밖에 없는 음식이어야 확실히 반응이 온다는 것. 외국에서 커리어를 다양하게 쌓은 셰프들은 유럽은 물론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고객들의 보수적인 음식 성향을 실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내가 돈을 냈으니 내가 전에 먹었던 바로 그 맛을 고스란히 먹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고, 이에 비해 외국은 돈을 지불한 만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쪽이 많다는 거였다. 봉에보의 이형준도 말했다. “예를 들어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중 하나로 접시에 당근 하나가 딸랑 나왔다고 치면요. 우리나라 같으면 ‘아니 내가 30만원짜리 코스를 먹는데 장난하는 거냐?라는 반응이 먼저 나와요. 그러나 일본에선 ‘아, 이 당근은 어디서 갖고 왔길래 이렇게 신선할까. 당근 맛이 되게 진하고 색깔도 예쁜 것 같다’는 반응이 더 많이 나온다는 거죠. 어느 쪽이 좋다는 게 아니라 문화와 성향의 차이죠. 하지만 셰프의 입장에선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자꾸 움츠러들게 돼요. 레스토랑들이 점점 비슷한 맛을 내게 되는 것도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많을 거예요.”
프랑스 요리가 서울에서 대중적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배경엔 프랑스 요리는 마치 오페라를 즐기듯 정색하고 차려입고 나가 고상하게 즐겨야 하는 고급 요리라는 편견도 한몫한다. 물론 하이엔드 퀴진과 프랑스 요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하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요리 관련 용어들이 여전히 프랑스어인 것만 봐도 요리에 있어 프랑스 문화유산이 가지는 막강한 입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국적의 요리에도 늘 수많은 결이 존재한다. 가정식이라 불리는 탄탄하고 정겨운 단품 요리들부터 아름다운 3시간짜리 코스 요리까지. 한식에 한 그릇으로 뚝딱 끝낼 수 있는 탕 요리에서 가정식 백반, 상다리 휘어지는 전주 한정식, 장금이도 울고 갈 수라상까지 골고루 존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형준도 이런 오해가 조금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스토랑에 싫어하는 사람을 데리고 오진 않잖아요. 가끔 소개팅처럼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경우는 있어도 그때도 대부분 잘 보이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더 많겠죠. 저는 맛있는 요리가 그걸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맛없어서 얼굴 찡그리게 되고 누가 오자고 했냐며 싸우는 대신 더 화기애애해지고 ‘아, 예쁘네요, 맛있네요, 뭘로 만든 걸까요?’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수 있는 요리요. 하이엔드를 지향한다며 분위기로만 압도하는 대신 거기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조합으로 메뉴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내가 좋아서 다니는 것뿐이지만 사실 맛을 찾아 거리를 헤맬수록 드는 생각은 하나다. 못생겼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느낌 있는 사람처럼 개성이 담뿍 담긴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것.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분자요리가 아니어도 좋고 한라산에 채취한 금보다 비싼 자연산 송이나 카스피 해에서 채취한 캐비어가 곁들여지지 않아도 좋다. 꼭 파리지앵의 감성을 고스란히 옮겨오지 않아도 좋다. 프랜차이즈도 아닌데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요리에 그릇만 바뀐 게 아니라 나름대로 셰프의 개성이 잔뜩 묻어난 이름 모를 요리가 고프다. 물론 진심이 담긴 서비스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런 소박한 레스토랑과 우연히 마주치는 행운을 기대해본다.
봉에보의 이형준 세프가 선보인 농어요리. 강낭콩과 레드와인 소스를 곁들였다.
*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월호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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