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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블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으며 러시아의 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어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코미디언이었기 때문에 외교적 역량이 부족했고, 그래서 러시아의 심기를 거슬러 전쟁이 났다는 주장이죠.
확실히 젤렌스키는 시트콤에서 대통령을 연기한 것 말고는 정치 경력이 없었습니다. 이 시트콤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큰 인기를 얻은 것이 대통령 당선에 주효했던 것도 사실이예요. 그런데 '아마추어 대통령'인 젤렌스키가 정권을 잡아서, 우크라이나는 '감당하지 못할 위기'에 빠진 걸까요?
그는 2018년 취임식에서 "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쳐 노력했다. 이것이 나의 사명이었다"라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젤렌스키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방세계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러시아와는 조상이 같고 언어도 통하지만 사이가 좋지는 않아요. 영토 자체가 유라시아 대륙 각종 문화권의 경계인데다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곡창지대여서 늘 주변 나라들의 공략 대상이었던 우크라이나를 가장 끔찍하게 착취했던 건 러시아였습니다. 단적으로 스탈린의 고의적 학살이라는 해석까지 나오는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그렇죠.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후 독립했지만 러시아는 사실상 이를 인정하지 않는 행보를 줄곧 유지해 왔어요. 때문에 현대 우크라이나는 밖으로는 러시아, 안으로는 친러 세력들과 끝없는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에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든 이유죠. 2014년엔 러시아의 도움을 받은 우크라이나 동부 크림 공화국이 독립하며 영토가 확 줄어들기도 했고요.
언급했듯 코미디언 출신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지도자로 거론된 건 그가 제작한 시트콤 〈인민의 종〉 덕입니다. 젤렌스키는 극 중 대통령이 되어 부정부패와 싸우는 역사 선생님으로 등장해 지도층 비리에 질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했어요. 이에 그에게 진짜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이 이어졌고,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젤렌스키는 시트콤 이름과 같은 '인민의 종'이라는 당의 대권주자로 나섰습니다. 대선 결과는 압도적 승리였고요.
전임 대통령처럼 친서방 정책을 이어가던 젤렌스키는 유럽연합(EU)와 나토 가입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2021년에는 러시아 때문에 우크라이나 독립이 위태롭다며 신속한 회원국 승인을 나토에 촉구하기도 했죠. 이때 국제사회에 '젤렌스키 정부 위기론'이 불거졌습니다. 당선 전 함께 일하던 측근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죠. 미국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대놓고 러시아 때문에 불안하니 빨리 도와 달라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이 되레 러시아를 자극한다는 분석입니다.
2월22일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루간스크, 도네츠크의 독립을 마음대로 승인하는데요. 이에 젤렌스키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항의합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폭격을 가했습니다. 지상군 역시 국경을 넘은 상태였습니다.
국방력 차이가 어마어마한 탓에 우크라이나의 패색이 완연해 보였죠.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배수진을 쳤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 세력에게 젤렌스키를 잡아 오라고 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숨지 않았습니다.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에서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전면에서 총력전을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젤렌스키의 피신을 돕겠다고 했지만, 그는 "도망칠 수단이 아닌 대전차 탄약이 필요하다"라고 답했죠. 또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현재 자신의 상황을 알리며 끝까지 우크라이나를 방어할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전 세계가 이 전쟁에 집중하기 시작한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젤렌스키의 행보 덕이기도 해요. 사실 21세기 들어 국가 간 무력 충돌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점령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국제적 관심이 오래 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엔 모두가 러시아에 전쟁을 멈추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미 "러시아 암살자들의 1순위 표적은 나이고, 2순위는 아내와 자녀들"이라면서도 결사 항전을 선언한 그의 용기 덕에 사흘이면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던 러시아의 예상은 틀렸고,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약 90%까지 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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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력으로만 봤을 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무모해 보였던 우크라이나의 전면적 대응과 국민 결속을 이룬 것이 젤렌스키라는 사실엔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그는 1일(현지시각) 열린 EU 특별회의에서 화상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승인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날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폭격을 언급하며 "우리는 그저 우리의 영토와 자유를 위해 싸운다"라는 젤렌스키의 말을 영어로 옮기던 통역사는 잠시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EU의 의원들은 연설이 끝난 후 기립박수로 화답했고요. 하지만 러시아의 미사일은 아직 멈추지 않았고, 푸틴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한 미국과 그 우방들에게 역으로 제재를 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