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떤 계기로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게 되었나
중학생 때 우연히 TV에서 샤넬 오트 쿠튀르 쇼를 보았는데, 그때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내가 상상하던 환상의 세계를 늘 평면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무대 디자인과 조명, 모델, 드레스들이 어우러진 샤넬 쇼를 보면서 패션을 통해 내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시즌마다 컬렉션 북을 모으고 스케치 연습도 하면서 꿈을 키우다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입학을 위해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카디 비, 마일리 사이러스 등 스타들이 미스 소희의 졸업 작품이자 데뷔작인 꽃을 닮은 ‘만개한 소녀’에 매료되었다. 무엇을 상상하며 만들었나
나는 늘 자연물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특히 꽃을 좋아하는데, 순수하면서 화려한 꽃의 매력을 탐구하고 싶었다. 오묘한 색감의 조화나 풍성한 실루엣, 장식처럼 화려한 수술 등 꽃이 지닌 특징을 의상에 집약시켰다.
바로 이 의상이 〈러브〉 매거진의 커버까지 장식했다. 러브콜이 쏟아진 이 옷을 만들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당시 코로나19로 영국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졸업 쇼가 취소되고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모든 학생이 작품을 집으로 가져가서 작업할 정도였다. 위기 속에 많은 유학생이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나는 남아서 작업을 끝내기로 결심했고, 배송이 몇 주 동안 지연되고 숍까지 문을 닫아 가게 주인과 화상 통화로 원단을 구매했다. 심지어 아파트마저 협소해 드레스를 천장에 매달아 보관했을 정도였다.
런던은 신선하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모여 있는 도시다. 이곳에서 쿠튀르의 전통성과 나만의 신선한 방식을 결합해 차별화된 쿠튀르를 선보이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쿠튀르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탄생하는데, 나는 이 과정이 즐겁다. 정성스럽게 지은 옷을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 미스 소희의 옷을 입는 경험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추억이 되길 바라며 옷을 만든다.
2021 F/W 컬렉션 피날레 드레스. 새로 고안해 낸 기법과 지속 가능한 재료를 이용해 아이코닉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아바카(바나나나무의 한 종류) 섬유로 만든 천에 자연광을 이용해 더 하얗고 반짝거리도록 1차 작업을 완료한 후, 거대한 조개가 얼굴과 어깨를 감싼 듯 형상화한 2차 작업에 몰두했다. 그 위에 수천 개의 재활용 크리스털까지 손바느질로 달았다. 제작 기간만 4개월 가까이 걸렸다.
런던 쇼룸에서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인 디자이너 박소희
지속 가능한 패션을 고민하는 브랜드와 작업하려고 한다. LVMH에서 운영하는 회사로, LVMH 소속 쿠튀르 메종 내에서 사용하지 않는 천들을 신진 디자이너에게 합리적 가격으로 판매하는 노나 소스(Nona Source)가 그중 하나다. 그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기반의 크리스털 브랜드 프레시오사(Preciosa)와 손잡고 재활용 크리스털을 컬렉션에 응용하기도 했다.
이번 2021 F/W 컬렉션에서 풍요로운 바다가 느껴진다
컬렉션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지내면서 보았던 해녀가 생각났다. 바다에서 찾은 다양한 보물을 짊어진 채 해변으로 걸어오는 해녀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현실판 인어 공주처럼 보였달까. 그 기억을 되살려 내가 맨 처음 해녀를 만났을 때 느꼈던 환상을 컬렉션으로 현실화하고, 반복적으로 영감을 주는 바다와 해녀를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고민했다. 해녀의 잠수복에서 영감받은 블랙 캣 수트, 다채로운 빛깔의 산호와 파도 치는 물결의 모습이 연상되는 실루엣의 드레스, 하얀 조개가 여인을 감싼 듯한 룩이 대표적이다.
덕분에 미스 소희의 옷은 곡선미가 돋보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패션 디자인은 조각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체라는 베이스 위에 새로운 조각품을 완성하듯이 말이다.
과거 마크 제이콥스 2020 S/S 컬렉션에 참여해 코르사주 장식을 만들기도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마크 제이콥스 런웨이 팀에 합류해 컬렉션 준비를 했었다. 그때 실험적으로 만들어본 코르사주를 마크가 좋아해서 쇼에 사용할 꽃 아이템을 도맡았는데 아틀리에 기술자들에게 내 방식을 전수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내가 꾸준히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에게서 자랑스럽다는 연락도 받았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마크 제이콥스 향수 ‘퍼펙트 인텐스’ 광고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바나나나무의 한 종류인 아바카 섬유와 재활용 크리스탈을 활용해 지속가능한 패션의 가치를 접목시킨 오트 쿠튀르 드레스. 무려 4개월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다.
미스 소희의 강점은 대담한 맥시멀리즘이다. 디자이너 박소희가 정의하는 여성상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 작업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담대하게 표현하는데 이 과정에서 과감한 색채와 실루엣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미스 소희에 내재된 극적인 낭만이 강인한 여성미로 표현되길 바란다.
뮈글러. 오래전부터 90년대를 누빈 티에리 뮈글러의 열렬한 팬이다.
SNS 프로필에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소개할 만큼 그림에도 열심이다
그림은 디자인과 또 다르다. 원단의 재질과 중력, 무게, 움직임 등에 구속되지 않고 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라 창조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준다. 그래서 디자인 발상이 드로잉하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그림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이다.
바빠질 내년을 위해 준비할 것이다. 공개를 앞둔 프로젝트가 많이 있는데, 이를 위해 시간과 고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리서치를 위해 올해 말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다. 우리나라 전통 섬유와 전통 의상을 탐구하고 싶다.
패션을 매개로 자유롭게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