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죠. 이른 아침까진 잔뜩 흐렸는데. 갑자기 하늘이 확 열리더니….
삭발로 카메라 앞에 선 건 군 제대 이후 처음 봅니다
‘비주얼 쇼크’를 믿거든요. 누군가 변한 모습으로 등장하면 일단 보게 되잖아요. 좀 새로워 보이고 싶었어요. 이미 많이 보여준 얼굴이니까.
헤비 울 니트와 팬츠는 모두 Ermenegildo Zegna.
10월 방영될 드라마 〈크라임 퍼즐〉을 위한 변신이죠. 살인을 자백하며 수감된 범죄심리학자를 연기해요. 그에게 어떤 호기심이 생기던가요
완벽한 사람은 절대 없다고 믿는데, ‘한승민’이라는 캐릭터는 가진 게 많았어요. 천재이고 냉철하죠. 그런데 그는 실수를 안 할까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까요? 저는 캐릭터가 가진, 흔들리고 불안정한 구석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든요. 한승민에게서도 그런 부분을 찾고 싶었어요.
〈크라임 퍼즐〉은 올레tv와 시즌(Seezn)을 통해 공개돼요. 또 다른 차기작도 글로벌 OTT 서비스와 함께 준비 중이라죠. 오랜만의 복귀작들을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 펼치네요
저는 TV를 안 봐요. 유튜브만 봐요. 그런지 꽤 됐어요. 요즘은 넷플릭스도 거의 안 보게 돼요. 이제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요. 플랫폼의 한계 같은 건 아무 상관없는 시대가 오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작품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쭉 떠돌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발견되고 또 영원히 남는 것이 되는 거죠.
영원히 유영할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또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겠어요
오히려 더 편해져요. 다른 건 따지지 말고 재미있는 작품이 오면 그냥 하자. 어디에서든. 이런 마음이 들어요.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아직도 연예 기사 면을 체크하는데, 매일 엄청난 물량의 콘텐츠 이슈가 쏟아져 나오거든요. 다음날이면 이슈 목록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대중을 상대로 제가 뭘 보여주겠다는 말조차 이상하게 느껴져요. 그저 나름의 필름을 쌓아가려고요.
헤어라인에 메이크업을 조금 하려 했더니 괜찮다고 했어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지금 윤계상의 방식인가요
원래 저는 그런 사람이죠. 예전엔 라디오 게스트로 나가서 말 한 마디 안 한 적도 있어요. 머리숱이 워낙 많아서, 좀 없어 보여도 괜찮고요(웃음).
지난여름, 유튜브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테이블〉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했었죠. “감정을 숨기는 일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인생의 한 시절을 아이돌로 살았어요. 완전히 솔직하기엔 위험할 때가 많아서, 진짜 감정 같은 건 눌러서 감추곤 했죠. 그러다 보면 자신과 거리가 먼 이미지가 만들어져요. 그 역시 내가 선택한 결과지만요.
수트와 이너 웨어, 부츠는 모두 Bottega Veneta.
코트와 폴로 니트, 터틀넥, 팬츠는 모두 Tod’s.
이젠 보이는 부분이 전부가 아니란 걸 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가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테이블〉도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고 있던 내 상태를 덮어두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글로는 자신 없어서 영상으로요. 영상은 보는 순간 감정이 형성되고 빠르게 흡수되니까.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제 친구와 함께한.
김린용 사진가요. 두 사람 꽤 오래된 친구 사이죠? 그와도 그렇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편이더라고요. 윤계상과 오래가는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관계가 정말 좁아요. 평소 거의 사람을 안 만나는 ‘안티 소셜’적인 사람이에요. 그냥 혼자인 게 편한 거죠. 이런 성향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과 오래가는 것 같아요. 어느 날 창문 열고 싹 얼굴 내밀었을 때 그냥 “어? 나왔네!” 하며 가볍게 반겨주는…. 그러다 다시 내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면 “그래, 잘 들어가! 6개월 뒤에 보자!”라고 해주는 사람들.
진짜 감정 같은 건 꾹 감춰왔다고 했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을 말할 때만큼은 더없이 뜨거웠던 것 같아요
연예인은 사랑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런데 살다 보면 마음이 울퉁불퉁해질 때가 있잖아요. 정말 하기 싫은 걸 할 때나, 자격지심이나 욕심이 커진다든가. 그럴 때도 가면을 쓰고 괜찮다고 말했죠. 사실 연기를 시작하고 군대 다녀온 뒤, 〈비스티 보이즈〉부터 〈최고의 사랑〉까지 너무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배우로 성장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을 꾹 눌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 시절 인터뷰를 종종 봐요. 되게 공격적이더라고요.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god로 엄청난 사랑을 받은 뒤였고, 너무 거만했고, 자신감과 욕심이 지나쳤어요. 대체 뭘 그렇게 가지려고 했을까 싶어요.
배우이면서 톱스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의지만 강했죠. 진짜 반성 많이 해요.
스스로와의 싸움이기도 했나요? 자신이 만족할 만한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아 괴로웠을지
그때는 기준점이 내 만족에 있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인정과 남의 시선이 중요했어요. “연기 너무 잘해요” “작품 너무 좋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어요. 외부 요인에 의해 느끼는 허기이니 박탈감과 결핍이 심했던 거예요. 내가 뭘 좀 아는 사람이었다면 기준점을 오히려 내면에 뒀을 거예요.
그 오랜 결핍이 채워졌던 시기는 역시 〈범죄 도시〉의 장첸을 만난 때였겠죠
그럼요. 오히려 그때는 순수했어요.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에요.
칼라리스 블레이저는 Masion Margiela by Mr. Porter. 터틀넥은 Zara. 팬츠는 Brunello Cucinelli. 플립플롭은 Havaianas.
헤비 울 니트는 Ermenegilddo Zegna.
치기 어린 에너지가 들끓는 시기는 청년기의 통과의례 같은데
그래도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 시절의 이상한 에너지와 고민 때문에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픈 것 같아요(웃음). 뇌동맥류도 그것 때문인 것 같고요.
극적으로 뇌동맥류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랐어요. 힘든 시간을 겪고 회복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있을까요
뇌동맥류를 정말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다른 검사는 할 게 없다고, 그냥 뇌 MRI 촬영을 한번 해보라는 병원의 제안에 서비스처럼 검사를 받았어요. 그렇게 발견했죠. 이 일을 겪고 나니 그 어떤 것도 귀한 게 없어요.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이런 한 마디? 결혼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에요. 삶이란 게 그냥 경험이구나 싶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 멋진 꿈이죠. 하지만 결혼 같은 선택이야말로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축하 인사를 할 수 있길 바랐는데, 지금이네요. 결혼 축하합니다. 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 신고를 먼저 했죠
린용이가 혼인 신고하는 모습을 기념으로 찍어줬어요.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절차여서 좀 놀랐어요(웃음).
결혼 소식 전할 때도 고민이 많았겠습니다. 솔직하고 싶고 또 보호하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 때문에
엄청 고민했어요. 알리는 글을 쓰는 게 정말 어려웠죠. 1주일 걸려 썼어요. 거짓말하고 싶진 않은데, 오해를 사기도 싫었으니까. 그래도 소식을 전했을 때 이상한 말이 따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많은 분들이 예쁘게 봐주셨어요.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져요. 나에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똑같은 일이었거든요.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하지 않고 나쁜 일이 생겨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고요. 나에게 일어난 일은 ‘이슈’로 소비되니까. 실은 이 자체가 되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냥 그렇게 공개돼 있는 것이… 제 아내는 인간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잖아요. 결혼하면서 그녀의 권리는 저로 인해 조금 줄어드는 거고요.
니트 베스트는 Polo Ralph Lauren. 팬츠는 Saint Laurent. 부츠는 Our Legacy.
니트 베스트는 Polo Ralph Lauren. 팬츠는 Saint Laurent. 부츠는 Our Legacy.
칼라리스 블레이저는 Masion Margiela by Mr. Porter. 터틀넥은 Zara.
인터뷰 준비하면서 이런 메모를 했어요. ‘인생의 관객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의 고생, 성공, 좌절, 화해, 사랑, 이별에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있다는 것, 그런 삶을 20년 넘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시선을 24시간 의식하게 되죠. 그래서 한때는 내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인가 생각해 본 거예요.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어요. 일은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관종’인 거죠. 어떻게 보면.
마음 깊숙한 곳, 나의 코어부터 천천히 다져 왔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 과정에 있죠. 나를 제외한 가족은 노출되지 않는 삶을 살길 원해요.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호할 거예요. 각자 나름의 인생을 충분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비스티 보이즈〉와 〈집행자〉에서의 얼굴을 좋아한다고 한 적 있어요. 청춘의 순간이 담겨서요. 또 다른 의미에서 좋아하는 작품 속 얼굴이 있나요
얼굴이 많이 변했거든요. 작품 하나를 시작하면 그것 외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어느 시절의 생각이나 정서가 작품 속의 나에게서 보여요. 모든 작품이 저에겐 그 시절의 초상화 같은 기록이고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예전에 했던 연기들을 지금 보면 엉망이지만… 얼굴은 모두 좋아요.
10년 전, 2011년 9월호 〈엘르〉와의 인터뷰에선 〈올드 보이〉 속 최민식이 지닌 얼굴의 주름이 멋있다고 했어요. 지금 당신을 설레게 하는 멋진 것은
선배님들이요. 저 이제 40대 중반이거든요. 딱 이만큼 경험해 보니 선배님들의 모든 게 대단하게 느껴져요. 꿋꿋하게 웃으며 버텨온 세월이 그 자체로 너무 놀라워요. 요즘은 이게 숙제예요. 연기는 감정 노동이라 계속 새로울 수는 없더라고요.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연기해 온 60~70대 선배님들은 마치 어제 연기를 시작한 것처럼 매번 새로운 연기를 보여줘요. 진짜 장인들인 거죠.
1년씩 차곡차곡 쌓다 보면 윤계상도 언젠가는…
저요? 저는 지금 불과 10년 앞을 바라보는 것도 벅차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