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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해 본 적 있나요?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이지만, 부모님과 둘만 남았을 때의 서먹함이 견디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평생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속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후회와 그리움 속에 살기도 하고요. 그 감정들이 안타까운 건 분명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일 테지만요.
무용가 윤혜진도 42세가 되도록 한 번도 아버지와 단 둘이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1947년 데뷔한 원로 배우 윤일봉입니다. 늦게 본 막내딸 윤혜진에게는 더 없이 무섭고 어려운 아버지였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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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JTBC '내가 나로 돌아가는 곳-해방타운'(해방타운)에서는 윤혜진이 윤일봉의 일일 기사로 나섰습니다. 줄곧 직접 차를 몰아 왔다는 아버지가 어느덧 88세의 고령이 되자 운전대를 잡는 것이 걱정돼 차를 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는데요. 아버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쓰였던 딸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조수석에 태우기로 결심했죠. 딸이 모는 차를 탄 윤일봉은 "네 차 타고 단 둘이 어디를 가 본 게 처음"이라며 내심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윤혜진은 그런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하려는 듯 줄곧 지그시 바라봤어요.
윤혜진은 며칠 전 한 염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윤일봉을 데리고 바버숍에 갔습니다. 시술에 앞서 지갑을 딸에게 맡기려다가 멈칫하는 아버지에게 윤혜진은 "아버지에게 저는 아직 아기다. 그래서 못 미더워 하신다"라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죠.
윤일봉은 시종일관 딸을 못 미더워하다가도, 시술을 맡은 미용사에게 딸 자랑을 늘어 놓았어요. 이를 영상으로 확인한 윤혜진은 "아버지가 저렇게 마음을 표현하시는 건 처음 봤다"라며 윤일봉의 진심에 감동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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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시술을 받는 동안 내내 옆에 따라 붙어 조잘거리던 윤혜진은 머리를 하는 윤일봉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두상이 예뻤구나"라는 칭찬도 잊지 않았어요. 그러나 뒤에선 "머리 하는 아버지를 보니까 갑자기 아이 같아 보였다. 어렸을 땐 호랑이 같았는데 지금은 바뀐 게 보여 속상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죠.
그런 딸의 속마음도 모르고 아버지는 "앞으로 나의 삶을 어떻게 정리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 그 마음을 누가 알아주냐"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윤혜진은 "난 진짜 그런 얘기 싫다"라고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가 '이제 내가 가고 나면'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너무 듣기 싫다.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이라며 "그런 순간이 다가오는 게 무섭다. 아빠도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부녀 지간 첫 데이트는 처음 하는 단 둘만의 식사로 이어졌습니다. 윤일봉의 단골 이탈리안 식당을 찾은 두 사람. 윤혜진은 그 동안 아버지가 이탈리안 음식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며 안타까워 했어요. 하지만 어색하다던 고백과는 달리 친구처럼 화기애애한 대화가 계속됐습니다. 42년 간 공유해 온 사소한 기억들을 나누면서요.
집으로 돌아와 친오빠에게 전화를 건 윤혜진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아빠가 할아버지더라"라며 "어릴 때는 아빠가 무서워서 싫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아빠였으면 좋겠다"라고 했어요. 아버지와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 잘 할 수 있을 때 잘 하자는 말과 함께요.
우리의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리는 사이 못 해 본 일들은 쌓여만 갑니다. 자식들의 시간에는 항상 부모님이 있지만, 언젠간 존재가 아닌 기억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도 오죠. 그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모님과의 처음을 계속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