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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 뉴욕 한복판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조직 알 카에다가 납치한 항공기가 차례로 제1세계무역센터, 제2세계무역센터, 그리고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까지 덮쳤죠. 세계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는 미국의 상징들이 잿더미로 변한 사건, 미국인들의 가장 큰 상처인 9.11 테러입니다.
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는 탈레반이 집권 중인 아프가니스탄(아프간)에 있었어요. 이들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가 있었지만 아프간은 거절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아프간과의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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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미국은 전쟁 시작 약 3개월 만에 탈레반 정권을 함락시켰죠. 이후 미국은 새롭게 수립된 아프간 정부를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 마무리를 하기도 전 미국의 관심은 이라크에 쏠렸습니다. 그 사이 탈레반은 파키스탄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아프간 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기대 오합지졸인 상태로 배만 불려 나갔죠. CIA가 가까스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지만, 길어진 전쟁은 미국에도 아프간 국민들에게도 상처만 남겼습니다.
이후 미군의 아프간 전면 철수가 결정됐지만 오바마 정부가 이를 뒤집었습니다. 군대를 빼는 순간 탈레반 재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임기 중 그런 일을 만들고 싶어하는 책임자는 없을 겁니다. 미국 대통령들의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 거죠. 그리고 결국 폭탄은 바이든 정부에서 터졌습니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아프간 정부군은 속절 없이 항복 선언을 했고, '아프간 공화국'은 탈레반에 의해 종말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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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지난 20년간 미군을 철수하기 좋은 시점이란 없다는 것을 어렵게 배웠다"라며 아프간 전쟁 종료 방식에 후회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이익이 없는 곳에서 끝없이 전쟁을 하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죠. 카불 공항은 아프간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마비됐습니다. 활주로까지 나와 출발하는 비행기에 매달리다가 결국 추락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탈레반이 아프간을 점령하자마자 여성들에겐 또 다른 지옥이 열렸습니다. 수도 카불의 거리에선 이미 여성들이 자취를 감췄다고 하는데요. 인디펜던트는 특히 아프간 주재 여성 기자들이 자신들의 기사 등으로 탈레반에게 응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겁을 먹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CNN의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클라리사 워드는 카불 시내 대통령궁 주변에서 탈레반 군인들로부터 "당신은 여자니까 옆으로 물러나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릴 때 여성들이 어떤 차별을 받아 왔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히잡과 차도르를 넘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눈마저 망사로 가린 부르카를 입어야 하는 게 대표적 억압의 사례죠. 뉴욕타임스는 탈레반 점령지에서 이미 길거리를 다니는 여성들에게 탈레반 남성들이 부르카를 강요하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여성 교사들은 남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으니 여학생들만 가르치거나 학교를 떠나라는 압박은 약과입니다. 12세 이상 여자 아이의 학교 교육은 금지됩니다. 이미 600 여 명의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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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자지라에 따르면 24일 열리는 2020 도쿄 패럴림픽에 아프간 사상 최초로 출전할 예정이던 여성 태권도 선수 자키아 쿠다다디 등이 나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카불 공항 마비로 인한 출국 불가였어요. 그러나 샌들을 신었다고 매를 맞는 나라에서 여성이 태권도를 한다는 것이 허용될 리 만무합니다.
아프간 전쟁 시작 후 아프간 국민들은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약간의 자유를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이 아프간을 지배했을 땐 '12세부터 45세 미만의 여자들을 정부가 소유해 전사들에게 선물한다'는 법이 있었어요. 2001년부터 2021년까지 탈레반이 사라진 아프간에 그런 법은 없었습니다. 탈레반 시대를 겪지 않은 아프간 전쟁 세대의 여성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프간 정부의 수장이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카불이 함락하자 돈만 챙겨 달아났습니다. 무려 차 네 대에 실었다는 그 엄청난 돈은 전쟁통에 다 가져가지도 못했어요.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현재 아프간을 지키고 있는 여러 관료들 중엔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인 랑기나 하미디도 있었습니다.

BBC
창문에서 최대한 떨어진 복도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BBC와 인터뷰를 진행한 그는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다. 전적으로 신뢰했던 대통령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라며 "마음 한 켠엔 아직 대통령이 떠났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미디는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나는 11살 딸이 있다. 아프간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를 느낀다"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이 꿈꿔왔던 모든 미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수백만 소녀들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