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수많은 신제품이 〈엘르〉 편집부 뷰티 팀 앞으로 도착한다. 큰 쇼핑백을 뜯어보면 보기 좋게 포장된 종이 혹은 플라스틱 박스가 담겨 있고, 그 안에 제품 ‘단상자’가 가지런히 들어 있다. 대부분 제품이 흔들리지 않도록 별도 포장재로 빈 공간을 메운 상태. 촬영을 마친 뒤 얼굴이든 손등이든 실제 효능과 텍스처를 테스트해 보고 다시 반납해야 하는 제품치고는 꽤 ‘거한’ 것이 사실. 매번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한다. 바쁜 업무에 치여 제품을 꺼내 사용해 보느라 바빴을 뿐 이 쓰레기를 정확히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분리수거해야 할지는 무신경했기에. 이런 죄책감은 비단 화장품 포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부 자외선차단제에 든 특정 성분이 산호초의 기형과 백화(白化) 현상을 야기한다는 뉴스, 해변가를 가득 메운 플라스틱 쓰레기에 살 곳을 잃은 바다표범과 최근엔 마스크 끈에 다리가 묶여 날지 못하는 새들의 모습은 별생각 없이 뷰티를 소비하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엘르〉 영국 뷰티 디렉터 케이티 영(Katy Young)도 이에 대한 에세이를 실은 바 있다. “뷰티 유저들은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꼬집으며 영국에서만 매년 272억 파운드가 뷰티 제품을 사는 데 쓰이는데, 이토록 어마어마한 집단적 소비는 곧 절실한 변화를 요구할 경제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물건을 사는 행위와 이와 결부된 도덕적 나침반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피부를 더 젊고 아름답게 가꿔주리라는 화장품 한 병에 거는 ‘희망’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더 근본적인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야말로 ‘뷰티 업계의 변화’를 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셈.
단순 소비자에서 적극적인 ‘시민’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완벽한 뷰티 쇼퍼가 되기는 어려워요. 내가 할 수 있고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맞는 라벨을 살펴보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죠.”
사실 식품에 있어서는 오래전부터 투명성이 요구돼 왔지만 뷰티는 다소 모호했다. 물론 9월 초 개정된 공정거래위원회 표시광고 지침에 따라 잡지사와 소위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사람들의 광고성 콘텐츠에 #광고 #협찬 따위의 해시태그가 붙기 시작했지만, 화장품에 들어 있는 성분과 패키지, 생산 이후 우리 손에 쥐어지기까지의 유통 과정에 대한 가이드는 자체적인 규제로 알아서 잘 굴러갈 거라고 여겨지곤 한다. 화장품은 ‘작은 사치품’이기에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식품과 동일한 잣대로 보지 않는 것. 유기농 루콜라 샐러드는 ‘유기농’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 엄격한 가이드를 따라야 하지만 ‘유기농’ 라벤더 배스 오일에 대한 규제에 대해 일반인이 명확하게 알기 힘들뿐더러 ‘자연 유래’냐 ‘유기농’이냐 ‘천연’이냐 ‘자연친화적’이냐 ‘클린’이냐, 사용한 용어의 한 끗 차이로 면책의 여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영국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실제로 적용되는 규정이 애매한 상태예요”라고 벨레다(Weleda) 영국 지사의 매니징 디렉터 제인 스터랜드(Jayn Sterland)는 말한다. “브랜드가 준수해야 하는 EU 규정이 있긴 하지만, 그건 주로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규제하고 있어요.” 클린 뷰티나 지속 가능성에 대해 논하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자연’이나 ‘유기농’ 성분에 대한 공식적 정의가 엄격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뷰티 업계는 자칫 ‘그린 워싱(Green Washing; 친환경으로 위장하는 행위)’의 온상이 되기 쉬울 수밖에. 친환경 이미지의 브랜드뿐 아니라 스킨 사이언스를 기반으로 하는 브랜드도 마찬가지. 몇몇은 규제를 피하기 위한 한두 가지 성분만 테스트하는 반면, 전 성분을 테스트하는 데 수천 달러 이상을 쓰는 브랜드도 있다. 결국 임상시험에 충실히 임하고 신뢰할 만한 결과를 내는 브랜드를 찾아내는 것은 소비자의 몫인 것. 그렇다고 해서 화장품 쇼핑을 일종의 ‘과제’나 ‘임무’처럼 여기라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독립 인증 기관들이 발행하는 각종 라벨을 현명하게 살펴보면 되기 때문. 다만 이런 인증 라벨들이 표준화되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우리는 단순 소비자에서 적극적인 ‘시민’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그에 맞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완벽한 뷰티 쇼퍼가 되기는 어려워요. 그린, 비건, 탄소 배출 최소화 등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고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맞는 라벨을 살펴보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죠.” 영국 최대 드럭스토어 체인 월그린스 부츠 앨리언스(Walgreens Boots Alliance)의 부대표 애나 틸(Anna Teal)의 조언이다. “뷰티 업계에서는 소비가 곧 투표권과 같아요. 만약 당신이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그 제품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변화에 앞장서는 윤리적인 ‘뷰티 시티즌’이 되는 것. 〈엘르〉의 쇼핑 가이드는 다음과 같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건 물론이요, 동물과 접촉한 성분을 배제해야 ‘크루얼티-프리’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빠른 확인법은 리핑 버니(Leaping Bunny)’ 마크를 찾는 것. 이 마크는 8개 동물보호단체가 연합하여 만든 CCIC(화장품소비자정보연합)에서 부여한다. 세계적 동물보호단체인 PETA 역시 자체 로고를 갖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 판매되는 기존 브랜드의 경우 법적으로 동물실험을 거친 성분이어야 했지만 2019년 4월 중국 정부에서 비동물실험 방법을 승인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생산과 운송 과정에서 특정 뷰티 브랜드가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지 현재로선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영국 친환경 인증기관 카본 트러스트(Carbon Trust)는 원료, 제조, 운송, 유통 등 모든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 즉 ‘탄소 발자국’을 측정하고 있는데, 코카콜라와 네슬레 같은 메가 브랜드들은 카본 트러스트와 협업하여 탄소 레벨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또 비영리기관 클라이밋 뉴트럴(Climate Neutral)은 기업의 탄소 상쇄 장치와 탄소 배출을 얼마나 감소시켰는지를 감독하여 라벨을 부여하고 있다. 현재 미국 6개 뷰티 브랜드만 이 인증을 받은 상태.
‘크루얼티-프리’라고 해서 모두 ‘비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콜라겐과 젤라틴, 라놀린, 글리세린, 우유 단백질 등 이름만 들었을 때 비건 성분인지 아닌지 가름하는 게 쉬운 성분도 있지만, 구아닌(생선 비늘에서 유래), 세라알바(꿀벌 왁스의 라틴명)처럼 덜 알려진 성분도 많기 때문. PETA에서 크루얼티-프리와 비건 라벨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4 CORAL-REEF FRIENDLY
」 2018년 하와이 주지사는 옥시벤존과 옥티녹세이트 등 산호초에 유해한 화학성분이 함유된 자외선차단제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당시 자외선차단제의 80%가 이 성분을 함유한 것으로 파악됐고, 많은 브랜드가 산호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리프 세이프(Reef Safe)’ 마크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해양 환경 보호를 위해서는 징크옥사이드나 티타늄디옥사이드 등이 함유된 무기 자외선차단제를 택하는 것이 좋다. 유칼립투스나 라벤더 같은 ‘자연 유래’ SPF조차 해양생물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 스프레이 타입의 경우 모래에 화학성분을 남겼다가 바다로 흘러 들어갈 수 있으므로 해변에서는 크림 타입을 사용할 것.
이미 오래전부터 뷰티 업계의 화두였던 다양성과 포용성. 40여 가지가 넘는 파운데이션 컬러를 선보인 리한나의 ‘펜티 뷰티’ 효과는 그간 얼마나 다양성이 부족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가짓수 이상의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뷰티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용과 개발, 유통 과정 전반에 걸쳐 다양성과 포용성이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직원 교육까지 뒷받침돼야 한다. 지난 6월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시작으로 여러 브랜드들이 다양성 고용지수를 발표하도록 촉구하는 ‘풀업(Pull up)’ 발안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린피스의 ‘포레스트 캠페인’은 뷰티 제품에 들어가는 팜 오일을 만들기 위해 삼림을 무분별하게 벌채하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벨레다 등의 브랜드들은 에티컬 바이오트레이드(Ethical Biotrade)로부터 ‘SWR(Sourcing With Respect)’ 인증을 받은 제조 업체로 바꿨고, 팜 오일 농장들 역시 취약한 생태계를 보호하는 지속 가능한 팜 오일 산업협의체 RSPO(Roundtable on Sustainable Palm Oil)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제품 포장이 산림친화적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FSC 마크가 있는지 눈여겨볼 것. ‘FSC 100%’는 제품에 사용된 모든 목재가 국제산림관리협의회에서 인증한 숲에서 생산됐음을 의미한다. ‘FSC Recycled’는 재활용 제지, ‘FSC Mix’는 재활용 목재를 사용했음을, 즉 불법 벌목된 목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 7 RECYCLABLE PACKAGing
」 더 많은 브랜드가 100% 재활용 가능한 패키지를 사용하고 있다. 렌 클린 스킨케어(REN Clean Skincare)는 ‘폐기물 제로’를 지향하며 특수 열과 압력을 사용해 재활용 플라스틱을 기존 플라스틱과 동일하게 만드는 무한 재활용 기술을 개발했다. 소비자가 제품을 재구매할 때 빈 용기를 직접 회수하여 세척한 뒤 다시 기업에 보내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배송 플랫폼, 루프(Loop)는 현재 한국 온라인 커머스 업계가 벤치마킹하기에 좋은 모범 사례가 될 것.
「 8 GENUINE SUSTAINABILITY
」 ‘지속 가능성’이란 단어를 쉽고 편하게 언급하곤 하지만, 사실 포장부터 성분, 운송, 유통에 이르기까지 가장 광범위한 개념이 바로 지속 가능성이다. 본질적으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제로’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다란 주제에 있어 특히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물. 세계물개발보고서(World Water Development Report)에 따르면 2050년까지 무려 50억 명 이상이 물 부족 현상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화장품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 중 하나는 바로 정제수 아닌가. 하지만 1kg의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약 450리터 이상의 물이 필요하고, 위생을 위해서는 매일 물로 씻어야 하는 만큼 얼마나 깨끗한 물을 많이, 오래 보존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이슈가 됐다. 일상에서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 제품에 불필요하게 함유된 미세 플라스틱에 안녕을 고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