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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환상의 런웨이. | 런웨이,트렌드,패션위크,도피,비비드 새드니스

  패션을 비롯한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공통으로 읽히는 키워드는 ‘도피’다. 지진과 테러,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 등 잿빛으로 우울한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이유일까? 한동안 놈코어와 유스 컬처 등 실용성에 기반한 스트리트 패션에 몰두했던 디자이너들이 드라마틱한 환상을 런웨이에 올리고 있다.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의상들이 각광받는 뉴욕에서 가장 먼저 변화가 감지됐다. 2019 F/W 뉴욕 컬렉션이 한창이던 지난 2월 인스타그램 피드는 거대한 무지개 컬러의 오간자와 러플로 물들었는데, 장본인은 디자이너 토모 코이즈미. 아이돌과 연극배우를 위한 코스튬을 만들고 있다는 그의 이력을 듣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전통 의상과 불상, 세일러문과 같은 만화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아 ‘비비드 새드니스(Vivid Sad-ness)’라는 컨셉트를 완성했다. 문장에서 풍기는 이중적인 의미처럼 어두워 보이는 내면과 유아적이고 밝은 기운을 조합하고 싶었다고. 그가 만드는 드레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스러움이나 삭막한 현실과 동떨어진 만화 같은 환상을 그리고 있다. 뉴욕의 터줏대감인 마크 제이콥스도 한동안 추구해 온 그런지 무드를 버리고 지난 시즌부터 쿠튀리에 면모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컬렉션을 ‘러플 갑옷’이라고 함축한 그는 1980년대 이브 생 로랑과 클로디 몬타나에게서 받은 단단한 실루엣으로 쇼를 시작해 아름답고 거대한 깃털과 샤 드레스를 무대 위에 올렸다. 뿐만 아니라 스테판 존스가 디자인한 예술적 디자인의 모자까지.     두 디자이너는 활기를 잃은 뉴욕 컬렉션에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재기 발랄한 런던 디자이너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환상을 그리고 있다. 디자이너 매티 보반은 대담하고 컬러플하며 창의성이 돋보이는 2019 F/W 컬렉션을 두고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표현했다. “확실히 낙천적인 컬렉션이에요. 사랑과 에너지가 가득하죠. 핸드메이드와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결합시킬 수 있는지 고민했어요. 단, 기교처럼 보이지 않고 재미있어 보이는 게 중요했어요. 이번 컬렉션에선 순수한 즐거움만 바라봤어요.”     몰리 고다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비전이 담긴 형형색색의 샤 드레스로 억제할 수 없는 로맨티시즘과 판타지를 드러냈고, 1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모델 리스트가 인상적이었던 시몬 로샤와 런던의 빅 쇼로 급 부상한 리처드 퀸의 쿠튀르적인 런웨이도 오래도록 잔상을 남겼다. 한편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는 쿠튀르를 발렌티노의 ‘꿈’이라고 말한다. ”저는 쿠튀르가 과거에 속한 것으로 보는 개념에서 발렌티노를 멀찍이 떼어놓고 싶어요. 무엇보다 발렌티노가 현대적인 쿠튀르 패션 하우스가 됐으면 좋겠어요.” 쿠튀르를 사랑하는 피치올리의 마음은 몽클레르와의 협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패딩이라는 기능적이고 현대적 소재로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움과 환상을 맘껏 펼치고 있으니. 정신적 구출이 필요한 시기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예술적 위로 도구를 찾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돌보고 즐거움과 행복을 찾길 원한다. 현 상황을 두고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화염과 분노’에 맞서는 패션계의 결단은 바로 인간이 누릴 ‘기쁨’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직접 입을 수 없다 해도 괜찮다. 이번 시즌만큼은 ‘보는 즐거움’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패션이 주는 달콤한 환상이야말로 지리멸렬한 일상에 잠깐의 도피처가 돼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