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있다. 긴 세월 동안 친구가 우는 걸 지난해 딱 한 번 봤다. 관객의 90% 이상이 울음을 터뜨리는 영화를 볼 때 그 아이가 “도대체 어느 장면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거야?”라고 푸념하는 걸 보며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도 한 적 있다. “넌 왜 안 울어?” “왜 울어야 해? 운다고 뭐가 달라져?” 반면 내겐 눈물이 일상이다. 남이 우는 것만 봐도 즉각 따라 운다. 드라마나 영화, 책을 볼 때 우는 건 당연지사다. 친구가 결혼할 땐 그 집 부모의 벅차고 서운한 감정을 상상하며 울었다. 가족이 죽는 생각, 심지어 내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금세 눈물이 줄줄 난다. 과하다는 거 안다. 그래서 남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쓴다. 우리가 눈물을 참는 이유는 울음에 대한 암묵적 정의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은 나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여겼다. 특히 미디어에선 여성을 너무 많이, 지겨울 만큼 자주 우는 비이성적 존재로 묘사해 왔다. 1999년 기네스 펠트로가 오스카상 수상 직후 흐느끼며 소감을 밝혔을 때 언론에선 이 장면을 ‘역대 최악의 수상 소감’으로 꼽았다. 오랜 세월 동안 ‘눈물’은 비판과 비난의 구실이자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군림해 왔다.
실제로 여성의 ‘우는 성향’이 남성보다 더 강할까? 책 <인간만이 우는 이유 Why Only Humans Weep>의 저자인 네덜란드 아드 빙어르후츠 교수는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그렇다’고 답했다. “연구에 따르면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 남녀의 울음 빈도 사이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사춘기 이후의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력하게 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내지 않도록 학습됐다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미국 세인트폴 램지 의료센터 정신과 연구실의 윌리엄 프레이 박사의 의견도 같은 궤에 있다. “우는 행위는 유전과 무관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5배 정도 더 자주 눈물을 흘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빈도에 영향을 끼치는 건 결국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작가이자 정신 건강 활동가인 맷 헤이그는 ‘우는 행위’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 긍정적으로 변하는 걸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혼자 있을 땐 자주 우는 편이지만, 다른 사랑 앞에선 울지 않습니다. 남성은 나이나 사회 지위가 높아질수록 감정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학습하기 때문이죠. 요즘엔 우는 것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화를 나눠요. 개인적으론 이 정도 변화로도 꽤 큰 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합니다.” 맷 헤이그의 경험을 주변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숨어서 울지 않는다. 모델 카라 델레바인은 매일 우는 행위를 통해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한다고 말했으며, 레이디 가가는 전 세계가 보는 오스카 시상식 무대 뒤에서 주저 없이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뉴질랜드 총리 자신다 아던은 올해 초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발생한 모스크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렸고, 전설로 불리는 테니스 선수 앤디 머레이는 은퇴를 선언하며 대중 앞에서 서슴없이 울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변화의 흐름은 포착된다. 당신이 지난 몇 년간 신문의 1면을 주시해 왔다면, 국가에서 주관하는 기념식, 추모식 등의 공식 석상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대통령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눈물의 지위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거듭 오고 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꽤 감정적인 시대를 지나고 있어요. 성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치인부터 운동 선수까지, TV를 통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볼 수 있는 시절이 없었죠.” 맷 헤이그의 말처럼 우는 행위는 더 이상 나약함의 표출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 장려할 만한 행위가 됐다.
여기에서 말하는 눈물은 물론 ‘감정’의 산물이다. 물리적 자극으로부터 눈을 보호할 목적으로 나오는 분비물이 아닌 이 감정의 산물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우리 모두 한바탕 제대로 울고 나서 속이 후련하고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낀 적 있지 않나? 미국의 심리학자 내털리 카울리는 이 ‘기분’의 근거를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우는 행위는 ‘기억이나 생각을 재처리’ 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치유 경험이라고 할 수 있죠.” 구로 연세봄정신과 박종석 원장도 눈물의 효용성에 의견을 보탠다. “대부분의 눈물은 부정적 감정을 오랜 시간 내적으로 투사하고 억압하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해 터져나오는 분비물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부정적 감정이 만성적으로 지속되면 기억력, 집중력, 둔화 등의 증상이 생깁니다. 즉, 우리는 우는 행위를 통해 이성적이고 중립적인 인지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눈물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전 세계의 ‘눈물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우는 게 건강에 좋다’는 맥락의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윌리엄 프레이 박사는 감정적인 눈물을 흘리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물질도 함께 씻겨 내려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울음이 호흡, 소변, 배변, 땀 흘리기처럼 체내에 축적된 독성물질을 체외로 배설하는 외분비 과정이라고 말한다. “슬플 때 흘리는 눈물엔 카테콜아민(체내에 과하게 축적되면 면역성이 감소되고 고혈압을 유발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다량 함유돼 있습니다. 즉 우는 행위는 우리 몸이 카테콜아민을 자연스럽게 체외로 배출시키는 자기방어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했는가?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는 행위는 땀 흘리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으며, 눈물에 감정적인 의미를 갖다 붙이며 자책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잘 우는 건 잘 노는 것만큼이나 유의미한 능력이다. 전문가들은 잘 못 우는 사람들이 대체로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낮다고 입을 모은다.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일수록 눈물의 치유 효과에 대한 경험이 적기 때문에 더 울지 못하는 혹은 울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밟는다. 임상심리학자 코드 베네키의 연구 결과는 이런 가설을 입증한다. 그는 잘 우는 사람과 울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서 울지 않는 사람들이 잘 우는 사람에 비해 후퇴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격노와 분노, 혐오 같은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잘 울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걸까? 빙어르후츠 교수는 “그저 잘 우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 높고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잘 쌓는 성향이 있을 뿐”이라는 말로 의문을 일축한다.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눈물은 윤활유 같은 작용을 한다. 진화 심리학자 오렌 하손은 인간의 눈물이 상대방과의 원만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눈물은 사랑과 우정을 강화시키며 유대감과 친밀감을 높여 관계 강화에 도움을 줍니다.” 치료학자 제프리 코틀러 역시 <눈물의 언어 The Language of Tears>에서 눈물이 사회적 언어의 기능을 하며 개인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 의견을 더한다. 어쨌든, 우는 게 쓸모 없다는 친구의 의견엔 동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처음으로(동시에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나와 선배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 때, 우리는 같이 울었다. 그 눈물은 전통적인 장례식에서 망자의 혼을 위로하는 가짜 울음 같은 사회 행위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울어본 그 ‘냉혈’의 아이콘은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 울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고 고백했다. 어쩌다 그런 날이 또 온다면 우리는 참지 않고 기꺼이 서로에게 손수건을 건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