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가 입은 수트는 Gucci. 티셔츠는 Michael Michael Kors. 신발은 Converse.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박지후가 입은 원피스는 Recto. 신발은 Byvaile.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영화 <벌새>는 중학생 2학년 소녀 은희가 마주해 가는 여러 감정들을 따라간다. 두려움, 질투, 수치심, 사랑, 애정…. 마치 감정의 지형도와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든 과거에 지나온 감정과 이야기에 맞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감독 김보라와 배우 박지후는 2년 전에 처음으로 만났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틈틈이 잡힌 상영회와 영화제 일정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촬영 현장에서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꼭 껴안고 반가워했다. 한 사람이 이야기할 때면 다른 한 명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청하고, 두 사람만이 아는 기억과 언어를 속삭일 때는 새들의 말을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풍광이 과연 어떤 색채를 띨지, 궁금해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벌새>의 배경은 1994년이다. 월드컵이 열리고, 김일성이 세상을 떠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가 당시 중학생이었던 감독의 자전적 기억에서 ‘이상한 해’로 호명된다면, 현재 고등학생 1학년인 배우에게는 세월호라는 사건이 있다. 시기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했을 감정의 여로를 담으려는 감독 김보라와 그 시도를 눈빛과 말로 재현해 낸 배우 박지후. 스무 살 넘는 나이 차이에도 인간과 인간이 서로 깊게 상대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의 형태가 존재한다면 지금 두 사람과 같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지런한 새, 꿀을 찾아 떠도는 벌새가 이파리 아래 잠시 날갯짓을 멈추고 평온을 찾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했다.   김보라가 입은 원피스는 Fadeiin. 이어링은 Gemma Alus. 박지후가 입은 원피스는 Sacai.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후 베를린국제영화제,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릴레이’ 수상을 이어가고 있다. 개봉일이 정해진 지금 심경은 김보라(이하 김) 막상 영화를 만들 때는 이 영화가 개봉하면 어떨지, 상상할 틈도 없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출품 며칠 전까지 계속 편집했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 올봄 지후가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 이전에도 어디를 가든 배우를 어떻게 찾아냈냐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오늘 처음으로 화보 촬영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다. 어른이 됐구나 싶어 ‘짠’하달까.   국내 개봉 전부터 쏟아지는 고무적인 반응들을 즐기고 있는지 박지후(이하 박) 내가 영화 덕분에 베를린에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관객이 나와 사진을 찍는 그 모든 상황이 황홀하고 선물 같았다. 사람 앞에 설 때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긴장하기도 했지만. 김 누군가 내 시나리오를 보고 밤새 울면서 쓴 글 같다고 한 적 있다. 아픔을 받아들이면서 진심으로 써 내려간 내용이 사람들에게 가서 닿고 있는 지금 상황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영화 주인공인 은희는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캐릭터라고 봐도 될까 김 영화적으로 각색됐지만 그래도 감정선은 중학생 때의 내 것이니 ‘반반’이라면 어떨까. 때문에 지후에게 갖는 감정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내가 느꼈던 감정을 ‘은희’로서 재현해 준 존재니까.   촬영 당시 배우는 극중 은희와 같은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영화 캐릭터와 객관적인 거리를 두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박 삐삐를 사용하는 모습처럼 시대 배경과 요소를 제외하면, 감정 자체는 지금 10대인 나의 감정과 다르지 않아서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남자친구와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고, 후배 앞에서는 괜히 센 척도 하고 친구와는 맘껏 놀기도 하는 다양한 면모들 말이다.   감독과 배우, 둘 다에게 첫 장편영화다. 직업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었을 것 같다 김 현장에서 나는 왜 이럴까, 무능함을 많이 느꼈다. 그래도 글 쓰는 걸 좋아하고, 관찰하는 습관을 가진 것은 스토리텔러로서 분명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농담처럼 ‘보라는 <벌새>에 30대를 다 바쳤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더라. 6년 정도 준비했고, 그 결과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왔으니 후회는 없다. 박 촬영 당시 배우로서 나는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기에 객관적으로 내 연기를 평가할 수 없었다. 감독님이 항상 촬영 때 마지막 테이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당황했지만 덕분에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 있다. 특히 친구와 화해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건 스스로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이었다. 주변에서도 지후가 드디어 연기를 알아간다고 했다.   영화 '벌새'의 감독 김보라와 배우 박지후 예전에는 ‘왜 예술을 하려고 하는지’ 같은 질문을 창작자들도 스스로 많이 던졌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표현하고 감상을 듣는 게 쉬워졌다. ‘영화’라는 정공법을 택한 이유는 김 누구나 살면서 나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을 통과한다.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그런 경험을 첫 단편영화로 만들었는데 학교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게 조금 달라진 걸 느꼈다. 나라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는 듯한, 그렇게 이해받은 느낌이 좋았다. 지금도 <벌새>를 본 사람들의 일부는 나를 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고 내적인 친밀감을 갖는 것 같다. 내 세계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을 뿐인데 타인이 이야기를 나눠주기도 한다는 것. 그 감정과 마음이 오가는 게 기뻐서 영화를 만든다. 박 5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을 처음 당했을 때는 놀러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점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그 인물을 파고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엄마가 얼마 전에 해준 말인데 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인도에서 TV를 틀어도 내가 나오고, 미국에서 TV를 틀어도 내가 나오고, 사람들이 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닐 거야!”라고 했다더라. 지금 생각하면 좀 신기하다. 김 이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분명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다. 재능도 없고, 힘들고 지긋지긋하다고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한테 울면서 얘기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너무 따뜻한 말투로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 정말 영화를 사랑하나 봐요”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정해졌다. 사랑하는 것이 항상 기쁨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박 오디션에서 나는 계속 떨어지는데 주변 친구들이 여기저기 나오는 걸 보면 자연히 지치게 된다. 감독님이 뭐든지 사랑을 갖고 하면 결과는 잘되기 마련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김 내가 그런 말을 했나? 부끄럽다.   10대 시절에는 가족이나 선생님을 제외하면 나보다 훨씬 연장자인 여성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후 씨도 감독과 시간을 보내며 배운 게 많을 것 같다 박 맞다. 다른 어른이었다면 나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거나, 얌전하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님 앞에서는 본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된다. 집이 대구인데 감독님 집에 놀러 가서 하룻밤 자고 같이 한강에 놀러 갔던 적도 있다. 김 그때 같이 삼겹살도 먹었잖아. 지후가 3인분이나 먹어서 깜짝 놀랐다(웃음). 박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힘이 되는 말을 정말 많이 해주셨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출을 하는 걸 볼 때면 저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우리 엄마도 감독님을 정말 좋아하신다! 김 지후 어머니께는 나도 감사하다. 키스신 같이 마음에 걸릴 수 있는 장면에서도 믿고 맡겨주셨다. 시나리오의 어떤 아름다움을 알아봐주신 것 같다. 사실 촬영 후반에는 지후가 현장을 거의 끌고 갈 정도로 나도 지후에게 많이 의존했다. 체력이 떨어져서 정말 기절할 것처럼 힘든데, 지후가 척척 알아서 하더라. 마지막 촬영 때는 스태프 모두에게 손편지를 썼다. 본인도 잠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박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특히 스태프들에게는 정말 감사했다. 은희를 닮은, 단발 여자애 편지지를 구했다(웃음).   영화에서 은희는 영지 선생님(김새벽)이라는 어른을 만나 위로받는다. 감독에게도 10대 시절 그런 어른이 있었나 김 시크한 짧은 머리를 하고 안경을 낀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를 아이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다. 지후랑 작업하면서 내 안의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서로 알아가던 시기에 지후가 밥을 먹다가 내게 서운해서 엉엉 운 적 있다. 그게 오래도록 미안했다. 지후의 감정을 마음으로는 이해했는데 이성적으로는 어른의 목소리가 잔소리처럼 나온 거다.   10대나 어린 친구를 대할 때 연장자도 두려움이 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김 마음 같아서는 나도 정말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진짜 관계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 또한 이 나이대의 사람을 이렇게 오래 관찰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기에 성장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최근 회사와 계약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정말 기뻤다. 감동적이었다. 박 감독님이 이렇게 기뻐하실지 몰랐다. 카톡으로는 ‘어머 정말 잘됐다, 너무 기뻐!’라고만 하셨는데….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을 촬영할 때 배우에게 ‘나는 네가 착하고 귀여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욕심도 있고, 여러 가지 욕망도 있고, 예민한 부분도 있고, 솔직함도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나눴다는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다 박 대본에는 딱 한 줄만 있었다. ‘오징어 춤을 춘다(웃음).’ 답답하고, 괴롭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차라리 그냥 다 드러내자고 몸부림치듯 춤춘 순간 ‘오케이’가 났다. 아무리 연기라 해도 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웠는데 그걸 깨게 된 장면이다. 지금도 가장 마음에 든다. 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지후를 몰아세운 것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감독으로서 방향성을 제시하려면 과장되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지후를 10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후가 그 장면을 통해 틀을 깼다면 나도 기쁘다.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면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김 영화를 찍으며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극중에서 영지 선생님이 했던 말인데 내가 쓴 대사에 결국 내가 위로를 받은 셈이다.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은희의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 <벌새>는 8월 2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포스터는 김승환 작가의 작품. 그러고 보니 이제 고등학생이 된 지후 씨의 실제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박 웃기고, 긍정적인 멋진 친구가 있다. 내가 나온 GV 영상까지 찾아보면서 “이런 말 쓰지 마” “이런 표정은 바보 같으니까 하지 마” 같은 조언도 해준다. 그런 관심이 참 고맙다.   여성 서사나 여성 영화인에 대한 논의가 예전에 비해 많이 이뤄지는 시기다. 변화의 흐름을 느끼는지 김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도 마찬가지였고 베를린, 뉴욕, 이스탄불, 타이베이…. 어떤 영화제에 가도 항상 여자 감독의 작품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영화를 하려는 여성들이 좀 더 함께 꿈꿀 수 있는 시기에 내 첫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분명 행운이다. 실제로도 주변의 평범한 여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영감을 받는다.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나 여자들이 갖고 있는 어떤 생명력 같은 것…. 다들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면모가 있지 않나. 박 영화인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오프라 윈프리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독후감 숙제가 있으면 항상 오프라 윈프리 이야기를 써내서 선생님이 책을 선물해 준 적도 있다. 같은 회사 소속의 한지민 선배도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이 <벌새>를 보러 올지 상상해 봤나 김 다양한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10대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면서. 박 친구들이 개봉하면 꼭 보러 갈 거라고 말하는데 긴장된다. 그래도 어떤 걸 느꼈는지 말해주면 내가 아는 숨겨진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 사람들의 후기가 궁금해서 개봉 전인데도 SNS에 영화 이야기를 틈만 나면 검색하고 있다. 좀 중독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