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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여섯 명의 셰프에게 ‘고향’이라는 키워드를 던졌다. 그들이 태어난 지역을 그린 냅킨 위에 그들이 여섯 명의 셰프에게 ‘고향’이라는 키워드를 던졌다. 그들이 태어난 지역을 그린 냅킨 위에 그들이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란 고향의 요리 여섯 가지를 차례로 얹었다. 그 잊을 수 없는 기억과 맛있는 이야기들. 에디터 정미환 포토그래퍼 이기석어릴 때부터 먹고 자란 고향의 요리 여섯 가지를 차례로 얹었다. 그 잊을 수 없는 기억과 맛있는 이야기들.

프로필 by ELLE 2010.09.20


1 이열치열
쓰촨성  천식설어

중국 관공서에서는 주소 이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인구가 너무 많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북경에서 요리사로 성공하고 결혼도 했지만, 내 본적과 호적상의 주소는 여전히 같다. 1년에 한 번, 주소지 확인을 위해 쓰촨성의 충칭시로 돌아간다. 공항에서 빠져나가 습도 높은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집에 돌아왔구나’ 생각한다. 쓰촨성은 중국 남쪽에 위치한 분지라 아주 무덥다. 한여름에는 말 그대로 땀샘이 막힐 정도인데, 쓰촨 사람들은 땀을 원활하게 흘리기 위해 매운 요리를 즐겨 먹는다. 오래전 그곳은 중국에서 가장 큰 곡창 창고가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지역이었다. 시장에는 온갖 재료들이 모여들었고 궁궐 같은 저택에서는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 불 앞에 섰다. 쓰촨 요리의 미각적 전통은 ‘100가지 요리가 있으면 100가지 맛이 난다’는 말을 끌어낼 정도였지만, 그 바탕에는 언제나 얼얼하고 톡 쏘는 맛을 뜻하는 ‘마라(麻辣)’의 철학이 깔려 있었다. 후추가 입 안에서 씹힐 정도로 화끈한 국물에 양고기를 익혀 먹는 훠궈, 고추기름이 둥둥 뜬 뜨거운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탄탄미엔이 대표적인 예다. 알싸한 향을 내기 위해서는 초피, 산초, 쓰촨 고추를 많이 사용하는데, 현재 쓰촨에서 가장 사랑받는 양념은 러우깜마 소스다. ‘러우깜마’는 ‘나이 든 여자’라는 뜻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간식을 파는 아주머니가 꼬치구이에 바르던 소스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고추와 화조, 땅콩 등을 원료로 처음 만들어진 것이 10년 전인데, 지금은 쓰촨 어디서나 러우깜마를 사용한다. 내게 고향 요리를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역시 이 소스다. 천식설어는 쓰촨에서 가장 인기 높은 생선인 메로를 러우깜마와 굴소스, 간장, 닭 육수로 졸인 요리. <삼국지>의 조조가 쓰촨에 들렀을 때 장강의 상류에서 즐겼던 생선이 메로의 친척쯤 되는 농어다. 당시에는 운송 수단이 적절하지 않아 바다에서 잡히는 메로를 맛볼 수 없었지만, 만약 그가 지금의 쓰촨에 온다면 이 요리를 아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장후이파 (그랜드 하얏트 호텔 ‘산수’ 셰프)


2 Boiled!
더블린, 새우 칵테일

아일랜드의 서점에 가본 적 있나? 더블린은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카 와일드가 태어난 도시지만, 애석하게도 아일랜드 전통 요리책이라곤 한 권도, 단 한 권도 없다. 출판사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채소든 고기든 우리는 그저 삶아 먹는다. 삶은 감자를 매시드 포테이토로 으깨고, 해초 역시 흐늘흐늘해질 때까지 푹 삶아 젤리로 먹는다. 돼지 피와 오트밀을 섞어 만든 아일랜드식 순대 ‘블랙 푸딩’이 있지만 그뿐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피시 앤 칩스는 영국에서 건너온 음식이고, 아이리시 커피는 미국인들의 발명품이다. 굴에 아일랜드 맥주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요리를 본 적 있는데, 아일랜드 국민은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하지 않는다. 굴이 담긴 접시 옆에 기네스 맥주를 놓으며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이렇게 고향의 요리를 부탁 받으면, 나는 아일랜드의 식재료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더블린은 ‘랑구스틴’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크기는 작지만 랍스터처럼 집게가 달려 있다. 더블린 앞바다에서 잡히는 것처럼 싱싱한 더블린 베이 프론을 제주도에서 발견했다. 그것을 아일랜드식으로 ‘그냥 삶았다’. 아일랜드 위스키로 만든 소스와 함께 한입 먹어보면, 달콤한 육즙과 탱탱한 식감이 입 안에서 춤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끓는 냄비에 재료를 밀어 넣는 것이 항상 나쁜 결과만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키아란 히키(W 서울 워커힐 호텔 총주방장)

3 비밀의 정원
뉴욕, 연어 스테이크
나는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뉴욕에서 평생을 보냈다. 내가 어린아이였던 1970년대에 아버지와 두 삼촌은 어부
로 일했고,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채소를 키웠다. 그 기억들은 셰프로서 내 정체성의 기초가 됐다. 뉴욕은 거대한 도시다. 아시아부터 북유럽까지 세상의 모든 유행이 그곳으로 흘러들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뉴욕 스타일’로 완성해낸다. 결국 뉴욕에서는 세계의 어떤 요리도 맛볼 수 있지만, 식당의 주방에서 사용하는 재료들은 대체로 뉴욕 근교에서 구한 것들이다. 브롱크스의 헌츠 포인트 수산시장에는 뉴욕의 어부들이 잡아온 신선한 해산물들이 어물전에 널려 있다. 새벽 3시부터 시장은 연어나 농어처럼 커다란 생선을 통째로 잘라가는 셰프들로 붐빈다. 여름이 찾아오면 뉴욕의 식탁은 롱아일랜드의 농장에서 재배하는 질 좋은 채소들로 넘친다. 탱탱한 토마토와 시원한 수박, 향긋한 허브와 향신료… 마치 할아버지의 뒤뜰에서 열리던 열매들처럼.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며 이 연어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신선한 연어를 구운 후, 프랑스산 식초 ‘바뉼’에 말린 후추와 치즈 크러스트, 수박과 토마토 조각을 섞은 소스를 곁들였다. 연어의 살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흩어지고 달콤하게 익은 토마토 향이 입 안 가득 남는다. 뉴욕의 감각적인 레스토랑에서 선보여도 무리가 없을, 뉴요커라면 누구나 고개가 끄덕일,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고향 요리다.”  저스틴 토스(쉐라톤그랜드워커힐 총주방장)



4 밥냄새 가득한 골목
토치기, 니쿠자가

나는 토치기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숲과 강에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였다. 부모님은 라멘 가게를 운영하셨다. 고향 사람들은 메뚜기를 바짝 졸여 먹거나 시모츠카산 두부를 으깬 요리를 즐기기도 했지만, 우리 집 식단은 대체로 라멘이었다. 나무 위에 아지트를 지어놓고 만화책을 보관하던 어린 시절, 어쩌다 가족과 스시를 먹으러 가면 수족관에서 반짝이는 생선 비늘에 넋을 잃었다. 스시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은 그때부터 시작됐고, 도쿄의 전설적인 식당 ‘스시 큐베이’에 들어가며 성취됐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역시 라멘이 가장 많이 떠오르지만, 가끔씩 어머니가 해주던 일본식 가정 요리가 더 그립다. 일본 요리에는 오색오미(五色五味)라는 말이 있다. 한 상 위에 다섯 개의 색과 다섯 개의 맛이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자장면처럼 색깔 하나가 지배적인 상차림이 없다. 어머니는 오이절임과 낫토, 관동 지방 특유의 아와세 된장으로 끓인 미소시루 등 다양한 요리로 색을 맞췄다. 그중 적색을 담당하던 것이 고기감자조림인 니쿠자가()였다. 일본 음식은 간장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 농도와 달기가 지방에 따라 다른데, 가정식에 맞춰 맛을 연하게 하기 위해 오사카 지방의 간장을 사용했다. 감자와 쇠고기, 당면과 당근이 기본이며, 오키나와에서는 돼지고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 어떤 재료로 요리하든, 일본 사람이라면 이 요리에서 밥 냄새가 풍기는 귀갓길을 떠올릴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고향 요리다.” 
마츠모토 미즈호 (웨스틴 조선 ‘스시 조’ 셰프)

5 Size doesn't matter
브렌 랄뢰, 헨트식 닭고기 요리

내가 태어난 고향의 주민 수는 100명 남짓이었다. 그러니 당신의 질문은 틀렸다. 벨기에는 아주 작은 나라고, 벨기에 국민에게 그런 질문을 할 때는 ‘고향 요리’가 아닌 ‘나라의 요리’에 대해 묻는 것이 옳다. 벨기에 요리는 북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메뉴의 70% 이상이 겹친다. 그러나 우리가 프랑스의 미각적 속국이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대체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프렌치’ 프라이의 원산지는 벨기에다. 우리는 신선한 홍합을 크림과 함께 삶은 후 감자 튀김과 먹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벨기에 음식을 비웃지만, 남프랑스의 지중해 쪽 해안선에 사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 홍합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프랑스와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는 술잔에 무엇을 따르느냐다. 그들은 와인을 마시고 우리는 맥주를 마신다. 벨기에의 국민은 100만 명에 불과한데, 자국 맥주의 종류는 400여 종이 넘는다. 심지어 요리에도 넣는다. 카르보나드 플라망드(Carbonade Flamande)는 벨기에산 브라운 에일을 넣어 만드는 쇠고기 스튜인데, 이 요리를 모르면 벨기에 사람이 아니다. 오늘 내가 준비한 음식에는 갈색 맥주 대신 검은 후추와 노란 마늘이 들어갔다. 벨기에의 유서 깊은 도시, 헨트(Gand)에서 처음 만들어진 닭고기 요리(Waterzooi De Poulet A La Gantoise)로, 올리브유 대신 크림이나 버터를 많이 쓰는 벨기에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닭과 리크, 무, 감자, 양송이버섯을 푹 삶은 후, 담백하게 익은 닭고기 위에 버터와 밀가루, 마늘과 블랙페퍼로 만든 크림소스를 얹었다. 소박하고 정직한 맛은 벨기에 농가의 식탁을 연상시킬 것이다.”  니콜라스 드 비쉬(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테이블 34’ 셰프)



미각의 고장
토리노, 아뇰로토 알 플린

지금까지 기억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맛은 초콜릿이다. 토리노는 디저트의 천국이었다. 시내에는 최고급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 가게가 몇 개나 있으며, 개암 열매가 많아 헤이즐넛 크림인 누텔라(Nutela)와 페레로 로쉐 초콜릿이 발원한 지역이기도 하다. 열 살이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요리사로 일하며 나는 내 고향의 또 다른 층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토리노는 드넓은 농지에서 재배되는 쌀과 전 세계 미식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알바산 화이트 트러플, 60종이 넘는 치즈의 고장이다. 16세기 말 이곳은 사보이 왕국의 수도로 낙점됐다. 절대군주의 탁월한 안목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들뿐 아니라 그날그날의 식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식도락가 집권층들 아래에서 소작농들은 다양한 원료로 소박하지만 깊은 풍미의 음식들을 만들어 먹었다. 토리노의 요리에는 그 모든 자연과 역사가 함께 흐른다. 오늘 준비한 요리는 토리노 지역 특유의 라비올리인 아뇰로토 알 플린(Agnolotto al plin)이다. 쇠고기와 샐비어, 다양한 채소를 다진 후 밀가루 반죽에 싸는데, 그때 두 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꼬집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플린’을 만들었다. 알맞게 삶은 아뇰로토 위에는 토리노 지역의 바롤로 와인으로 만든 소스를 끼얹었다. 작은 크기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빚는데, 한국에 온 후로는 처음 만들었다. 삶는 도중 몇 개를 집어 먹어 봤다. 내가 만든 요리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맛이란, 토리노의 음식이란!” 
스테파노 디 살보(파크하얏트 서울 총주방장)


*자세한 내용은 루엘 본지 9월호를 참조하세요!

Credit

  • 에디터 정미환
  • 포토 이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