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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천의 얼굴들

‘알고 보면 매력 덩어리’. 그가 농담 삼아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사실이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에서 천생 배우와, 반들반들한 피부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와, 탄탄한 몸에서 자기관리 철저한 CEO와 마주쳤다. 눈동자에 담긴 청양 출신 늦둥이 막내아들도 만났다. 마주 앉아 뜯어본 홍석천의 얼굴에 그 모든 게 담겨 있었다.

프로필 by ELLE 2010.08.09


그 남자 담백하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구설수에 시달렸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물집은 굳은살이 됐다. 딱딱한 외피로 온몸을 감싼 아르마딜로가 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맨몸이다. 민낯으로 이태원을 활보하고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신이 나 어린아이처럼 뛰어간다. 어떤 말도 호기심에 가득 차 귀를 활짝 열고 듣는다. 날카로운 말에는 고스란히 상처받고, 모르는 사람의 말 한 마디가 그를 하루 종일 휘저어놓을 때도 있다. “편지나 쪽지 같은 걸 많이 받아요. 돈 좀 보내주세요, 저희 집 좀 살려주세요, 이런 거요. 제가 3천 만원을 왜 줘야 한다는 건지, 그 사람을 왜 도와야 한다는건지 사연을 쭉 적잖아요. 수도 없이 받는 것들인데도 읽을 때마다 또 마음이 움직여요. 내가 진짜 안 도와주면 이 사람 죽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막 가슴이 아파요. 안 죽을 거 알면서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 알면서도, 진짜면 어떡하지 그런 거 있잖아요.” 인터뷰 중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맨살을 드러낸다. 하긴, 두꺼운 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꽁꽁 숨길 필요가 왜 있겠나. 더 이상 숨길 게 없다. 진실은 그의 강력한 무기다. 강하지만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뛰놀던 소년의 순수함 역시 남아 있다. 충남 청양, 여름에는 계곡에서 멱을 감고 겨울에는 포대를 썰매 삼아 세상을 다 가진 듯 미끄럼을 탔다. 부모님은 포목점을 하셨다. 포목점이 있던 시장 바닥을 우주로 알고 뒹굴었다. 말 많고 그만큼 끼도 많아 그 시절부터 종종 무대에 섰다. 아직 작기만 하던 그를 소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느끼게 했던 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것, 온몸으로 뭔가를 표현한다는 바로 그것. 연기는 그때부터 품어온 단 하나의 꿈이다. “전 그냥 배우일 때가 가장 행복해요. 연기하는 순간이 가장 기분 좋고 에너지가 마구 뿜어져나오죠. 그런데 아직까지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대신 요즘에는 저를 ‘잘나가는 CEO’로 포커싱을 해요. 제 가게 매출이 얼마네, 가게가 몇 개네, 그런 것들에만 주목을 해요. 물론 제 레스토랑들을 아끼죠. 그런데 정작 제가 정말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거든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MBC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의 ‘쁘와종’ 역할로 네 살배기 아이도 아는 스타가 됐다. 여러 공연을 거쳐 대형 뮤지컬 <코러스 라인>으로 호암아트홀 무대에도 올랐다. 그리고 2000년 커밍아웃. 어떤 이는 그를 비 맞고 길 잃은 고양이라도 되는 양 측은하게 여겼다. 어떤 이는 그를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초록색 피부의 외계인처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당해온 것들을 한탄하지도, 이겨온 것들에 도취되지도, 지금 가진 것들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담담한 말 한 마디에 섬세한 제스처 하나. 그는 예민하고 감성적이지만 뒤틀리거나 과잉되지 않은 인간이다. 더 이상 발가벗겨질 게 없는 자유롭고 홀가분한 사람이다. 그저 순간에 충실하고 감정에 순종할 뿐. ‘커밍아웃 1호 연예인’, ‘성공한 CEO’, ‘제2의 전성기’. 온갖 수식어는 우리가 그에게 붙인 것들이었다. 요즘 연애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1초의 망설임도, 약간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얼굴로, 몸으로, 말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솔직함을 그저 솔직함이라 하는 건 진부하다. 그는 솔직한 게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담백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저는 굉장히 솔직해요. 솔직한 게 좋기도 하고요. 거짓말을 잘 못해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면 얼굴에서 티가 나요.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러니까, 그게 맞으면 정말 편한 관계가 되고 잘 안 맞으면 다시 안 보게 되죠.” 솔직함 때문에 했던 커밍아웃. 인기 절정에서, 그야말로 세상의 중심에서 외친 거다. 나, 게이예요. 속으로 몇천 번 되뇐 말이었다. <코러스 라인> 무대에서 게이 폴의 독백을 빌려 했던 말이었다. 얼마든지 묻어두어도 될 말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소개하지 못하는 미안함, 떳떳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용기. 대가는 혹독했다. 출연 중이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심정적인 자유를 온갖 부당한 대우와 맞바꿨다. 이유 없는 혐오, 근거 없는 경멸. 인기와 관심은 낱낱이 화살과 독이 되어 돌아왔다. “대한민국 전체가 저를 왕따시키는 듯했어요. 뮤지컬 공부 하러 뉴욕에나 갈까 생각도 해봤죠. 하지만 그건 도망치는 거 같았어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버텨야 한다면, 내가 자라온 땅에서 하고 싶었어요.” 이 땅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10년. 날카로운 말들에 상처 입고 무뎌지고 가끔 한 번씩 날을 세우기도 하며 그도 변했다. 그리고 세상과 대중도 같이 변했다. “아까 저한테 인사하신 아주머니 네 분 있잖아요. 10년 전이었으면 그런 분들이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동안 어쨌든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 건 사실이에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게 된다는 얘기거든요. 동성애가 낯설다거나 거리를 둬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상당 부분 극복한 거죠. 제 입장에서도 사람들을 대하기가 전보다 편해요. 방송할 때도 예전 같으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절 좀 불편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요즘은 너무 즐겁거든요.” 하지만 한국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0년 6월을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달’로 정한 것과 관련해 용산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홍석천과 함께하는 동성애자 인권 간담회’에 참석했다. ‘인권 운동가’라는 거창한 명함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커밍아웃 1호 연예인’이라는 떨어지지 않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면서 느끼게 되는 책임감 때문에 그는 종종 자연스레 한국의 많은 동성애자들을 대변하는 이름이 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성애자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개념조차 없어요. 게이들은 무조건 여자 같은 줄 아는데, 산도적처럼 생긴 사람도 있고 그렇잖아요.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오픈을 안 하고 숨기고 살아가니까요. 제 어깨에 지워진 큰 짐이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 있어요. 어떤 때는그무게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에요. 외롭고 지칠 때도 있죠.” 그렇다면 이제 와서 10년 동안 반복해온 이야기를 또 한 번 한다는 게 귀찮지는 않을까. “10년 만에 그런 얘길 다시 하는 것도 의미가 있죠. 시간이 많은 걸 바꾼 게 사실이니까. 그 변화에 제가 영향을 미친 부분도 꽤 있는 거 같고요. 이러다 나중에 교과서에도 실리는 거 아닌가 싶어요. 하하.”


타인의 취향

여행을 가거나 촬영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그의 레스토랑 중 한 곳에 있다. 이태원의 ‘마이 치킨’, ‘마이 타이’, ‘마이 차이나’, ‘마이 첼시’, ‘마이 베드’, 그리고 홍대 ‘플레이’. 얼마 전에는 압구정의 마이 타이 2호점 오픈을 돕기도 했다. 그는 늘 자신의 가게에서 쉬고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을 만난다. 주문을 받고 메뉴를 추천하고 서빙도 한다. 그의 레스토랑은 그에게 음식을 파는 곳,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정말 ‘나의’, ‘우리의’ 공간이다. “커밍아웃 후 방송 출연과 연기를 할 수 없게 됐을 때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어요. 음식, 수다, 인테리어, 그림, 음악, 이런 것들을 쭉 나열해보니까 딱 하나로 엮이는 거 있죠. 레스토랑. 그래서 2년 동안 클럽에서 DJ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연기 말고 제가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시작했어요. 모든 가게를 정말로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 넣었어요. 연예인 동료들이 부러워해요. 방송이 없을 때도 늘 에너제틱하게 뭔가를 하고 있고 사람들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까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래도 좀 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다. 한 군데 한 군데가다 혼을 빼다시피 준비한 곳이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곳은 마이 타이. 첫 번째 레스토랑 ‘아워플레이스’가 안정된 후,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오픈한 마이 타이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그에게 ‘이게 사업이 되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곳이자 홍석천의 색깔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태국을 유난히 좋아해요. 1999년에 방콕의 ‘로얄 드래곤’이라고, 세계에서 가장 큰 수산물 레스토랑에서 촬영한 적이 있어요. 그때 태국 음식이 어떤 건지 알았죠. 주방도 들어가고 홀도 나가보고 태국 스태프들이랑 기숙사도 같이 쓰고. 그러면서 태국 사람이나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태국 음식이라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아이템, 때마침 불던 에스닉 열풍, 대로에서 살짝 들어간 조용한 골목의 1층 공간. 마이 타이의 성공은 복합적이지만 어쩌면 필연적이다. 스타일리시하기로 소문난 홍석천의 취향과 안목이 만들어낸 이국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이태원의 외국인들과 트렌드세터들을 매혹시켰다. 방콕의 나이트 바자에서 구입해 보따리에 싸온 불상, 액자 틀 조각을 모아 붙인 출입문, 황학동에서 산 전통 베틀 조각으로 만든 전등갓 등. 아워 플레이스에도 마이 차이나나 마이 첼시에도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그의 숨결이 녹아든 건 마찬가지다. “시골에서 자연을 가까이하고 자란 게 자랑스러워요. 부모님이 일하시던 시장에서 놀았던 것도. 그게 제 모든 감각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게 다 있잖아요, 자연과 시장에는. 게다가 게이니까 뭔가 새로운 걸 놓치지 않고 잡아내죠. 물론 게이들이 다 섬세하고 스타일리시한 건 아니에요. 스트레이트들도 어떤 사람은 그렇고 어떤 사람은 안 그렇잖아요. 게이들도 똑같은데, 비율상 감각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면 돼요.” 늘 반 스텝 정도 빨랐다.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아이돌 그룹들이 TV 화면을 가득 채울 때 생각했다. 왜 아이돌 그룹은 다 똑같을까, 약간 복고풍으로 하면 잘 되겠는데. 얼마 뒤 원더걸스가 정상에 올랐다. 똑같은 건 싫다. 너무 다른 것도 싫다. 요만큼만 새로운 것, 살짝 비튼 것  남들과 약간 다른 것.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눈으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승연과 홍대에 오픈한 공간이 플레이다. 아워 플레이스는 마이 치킨으로 리뉴얼했다. “아워 플레이스의 컨셉트를 홍대로 옮겨서 확장한 게 플레이죠. 마이 치킨은, 이제 한국 퀴진을 해보려고요. 고급 한식 말고 우리가 편하게 먹는 저렴한 것들. 오돌뼈, 주먹밥, 골뱅이 소면, 번데기탕, 열무 김치 국수. 그리고 치킨은 정말 맛있는 곳에서 레서피를 사왔어요. 주방장 보내서 교육도 시켰죠. 저희도 나름 맛있다고요. 하하.” 담배 한 대를 꺼내 문 그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그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재밌잖아요. 어, 홍석천이다! 했는데 그 홍석천이 먼저 인사를 해오면. 인사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에게서, 쁘와종이나 폴에게서도 <퍼즐>의 노나 <태양을 삼켜라>의 지미, <커밍아웃>의 MC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한 자락 여유가 보였다. 정신없이 바빴던 몇 달. 이제 플레이도, 마이 치킨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토록 고팠던 연기를 할 수있는 기회도 꾸준히 생긴다. 그 자신도 이제 다시 한번 셋업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조만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까 싶다. 배우도, CEO도 아닌 인간 홍석천으로. 조금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방법을 고민하러.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

Credit

  • 에디터 강경민
  • 포토 우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