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영의 101가지 스타일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엘비스 코스텔로의 노래처럼 그녀는 여름이 가져다준 음악일 수도 있고, 가을의 서늘함일 수도 있다. 그녀는 미녀이거나 야수일 수 있고, 하루라는 시간 안에 변하는 수백 가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정형화된 틀 밖으로 벗어나 무한 변이로 증식하는 스타일의 세계에선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서은영,스타일리스트,엘라서울,엘르,엣진,elle.co.kr:: | ::서은영,스타일리스트,엘라서울,엘르,엣진

그녀에 관한 첫 문장은 ‘그녀’로 시작된다. 세상 모든 여자를 지칭하는 대명사. 모리스 블랑쇼 식으로 말하자면 그녀, 서은영은 여자의 여러 가지 이름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음성으로 발음되는 여자다. 이제는 대한민국 스타일리스트의 대표 명사가 된 서은영. 그녀는 미다스 같은 손으로 여자들의 매무새를 다듬어 왔다. 그녀의 손끝에서 여자들은 더 짙은 향기를 풍기는 여자로 다시 피어난다. “저란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에요. 여자라는 이름을 사랑해요. 또 그것을 위해 살고요.” 이 문장을 말할 때 서은영은 꿈속을 거니는 듯한 눈동자가 된다. 커다란 눈망울에 파고가 일고, 샹송 같은 목소리로 춤추듯 말한다. 이럴 땐 ‘천상 여자’라는 표현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일할 때만큼은 뜨거운 감성보다 차가운 이성의 지배를 받는 편이다. 냉철하게 빛나는 안광, 단단한 옷차림, 직설 화법은 프로페셔널한 서은영을 완성하는 카리스마지만 덕분에 다가가기 힘든 여자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다, 무섭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죠. 어렸을 땐 그런 말에 상처도 받았어요. 그런데 결국 강해보이는 것도 나고, 그런 말에 상처받는 여린 모습도 나예요. 이제는 그 모든 걸 그냥 품기로 했어요. 남들의 이야기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기로. 다만 사랑이 많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 사랑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여자, 관용과 희생으로 세상을 안을 줄 아는 진정한 여자 말이에요.” All About Style서은영이 처음부터 스타일리스트의 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윈, 클럽 모나코 등 내셔널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입문해 경력을 쌓았다. 베스트 스타일링은 직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디자이너 시절을 통해 얻은 전문 지식이 탄탄한 베이스가 됐다. 뉴욕에 가려고 했다. 맨해튼을 누비는 멋진 디자이너로 폼 나게 살아볼 작정이었지만 사람의 인생은 때때로 우연치 않은 계기로 물길의 방향을 바꾼다. 친분 있던 포토그래퍼 김용호가 던진 “에디터가 되면 해외 컬렉션에 갈 수 있다”는 말에 그만 혹했다. 서은영의 이력에 패션에디터라는 직업이 추가된 순간이다. 에디터 경력을 통해 맺은 작업 시스템과 화려한 인맥이 지금의 서은영을 있게 했다. 에디터에서 프리랜tm 스타일리스트로 독립을 선언한 건 소박한 꿈 하나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엔 언제든 떠나기 위해서. 지금 서은영은 스타일링 컨설팅 에이전시 ‘아장 드 베티’의 대표다. 지금 그녀는 처음 품었던 소박한 꿈 대신 스타일에 대한 묵직한 소명 하나를 어깨에 얹고 간다. “스타일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색’이에요. 스타일은 ‘어떤 색을 내느냐’에 달려 있거든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저의 색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히려 색이 없기 때문일지 몰라요. 그래서 더 많은 색을 담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해져 있는 색은 재미없죠. 빈 팔레트에 여러 가지 색을 섞어 멋진 색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스타일의 미덕이에요. 스타일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을 단단하게 정립해보고 싶은 마음이 소명이라면 소명이겠죠.”스타일리스트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느냐’는 것이다. 해답은 조화와 깊이에 있다. 비싼 것으로 온몸을 휘감는다고 해서 스타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대문에서 구입한 8천원짜리 안경테와 샤넬 클래식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순간 스타일은 완성된다. “발렌시아가로 도배를 해도 입는 사람이 힘들면 보는 사람도 힘들어요. 시장통에서 착장한 옷이라도 입는 사람이 편안하면 그게 더 스타일리시해 보이죠. 즐겁게 입기, 당당하게 입기. 그런 마음으로 옷 입은 사람들은 그걸로 된 거에요. 거기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더 웃기는 거지. 요즘은 ‘깊이’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요. 톰 포드는 좋아하는 패션 디자이너지만 최근 감독으로 데뷔해 만든 영화 은 별로였어요. 흠집 없는 도자기처럼 예쁜 영화지만 주둥이가 너무 작아 더 담을 수도 뺄 수도 없는 한계가 보였달까. 스타일이 아무리 완벽해도 영화에 관한 깊이가 없으니 결과가 좋지 않았던 거죠.” 서은영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궁극의 패셔니스타로 꼽는 인물은 조니 뎁과 오드리 햅번이다. 조니 뎁은 만능 옷걸이다. 어떤 스타일의 옷도 걸치는 대로 척척 자기 것으로 체화시킨다. 그것은 꾸불꾸불하게 살아온 그의 삶과 경험이 빚어낸 깊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무리 예쁘대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오드리 햅번의 아름다움은 선한 목적을 가진 삶에서 왔다. 젊은 시절 미모를 다투었다할지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아름다울 수 있던 사람은 오드리햅번이었다. 한편 서은영은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시선과 스타일에 관한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고집스런 스타일링 철학과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의 힘, 배우 고현정, 피겨 선수 김연아, 정치인 정몽준 등의 톱스타가 자신의 스타일링을 내맡긴 연유다. “고현정 씨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팔목이 가늘어요. 고급스러운 인상 때문에 오히려 화려한 게 안 어울리죠. 앤드밀, 이자벨마랑 등의 브랜드를 주로 권하는데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지 권해준 옷을 다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요. 김연아 같은 경우는 한창 멋 부리고 싶은 나이라 그런지 여성스러운 옷을 선호하고요. 콘셉트가 제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고 싶은 것을 입게 두는 편이에요. 아까 말했듯 옷 입기라는 건 ‘입는 즐거움’을 줘야만 하는 영역이니까요.” 깊이 있는 스타일링 훈련에 관해 서은영이 던져주는 해답은 클래식한 아이템이다. 클래식에는 조화와 깊이, 고유의 색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스타일에 대해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클래식은 스타일이 꿈꾸는 작은 우주다. No Love, No Style생 제임스의 전형적인 마린 스타일, 스트라이프 티셔츠, 랄프 로렌의 니트 드레스, 라코스테 피케 셔츠, 모브쌩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미키모토의 진주, 블랙 꼼데 갸르송의 도트 원피스, 아장 프로보카퇴르의 란제리. 서은영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다. 한번 예뻐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에 쏟아 붓는 애정은 그야말로 무한대다. 반한 이유, 사랑하는 이유, 계속적인 사랑을 줘야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사랑하는 아이템의 범위는 점점 진화하고 범우주적이 되어가고 있다. 수첩, 버터, 치약을 막론하고.“몰스킨 수첩 디자인은 그야말로 스타일의 방점이죠. 군더더기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잖아요. 미니멀하지만 세련됐고, 클래식함이 진부하지 않아요. 앙리 마티스, 빈센트 반 고흐,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거장들이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존재감이 있지요. 에쉬레 버터는 정말 맛있어요. 갓 구운 바게트에 에쉬레를 발라먹는 기쁨이란! 모래주머니를 달고 운동장 100바퀴를 뛰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먹어줘야 해요. 빵 두께와 거의 같은 두께로 척 발라서. 유기농 치약 마비스는 치약을 짜기 미안할 정도로 패키지 디자인이 예술이고요.” 연극배우 같은 제스처로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때 서은영은 꼭 아홉 살 소녀 같다. 엄마 화장대에서 꺼낸 립스틱을 찍어 바르고 제 발보다 훨씬 큰 하이힐을 신고 달뜬 천진무구한 아이 모습이 그녀의 얼굴 위로 선연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얼마 전 자신의 페이보릿, 첫 조카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101가지 아이템을 한데 모아 라는 책으로 펴냈다. 모델 장윤주와 함께 쓴 과 혼자 만든 에 이은 그녀의 세 번째 책이다. 그뿐이 아니다. ‘Ask Betty'라는 제목으로 에 연재되던 사연과 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충실하게 담은 네 번째 책 도 연이어 출간됐다. 이 책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스타일 멘토였던 그녀는 젊은 여성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카운슬러 ‘베티’로 변신했다. 수년 전, 서은영에게 연애 카운슬링을 받은 적이 있다. 컬럼을 쓰기 위해 스타일링 코치를 받았는데 스타일링보다 기억에 남는 건 그때 들은 진솔한 경험담이었다.“사랑에 있어 내 20대의 기억은 좀 슬퍼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연애를 안 했거든. 사랑에 대한 심한 결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완벽한 남자를 만나야한다는 강박 탓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보수적인 데가 있어서 모델 스타일링은 늘 과감하게 하면서도 정작 난 클래식한 룩만을 고집했어요. 스커트는 무릎 아래, 첫 단추는 언제나 꼭 여밀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엄격한 기준들이 있었지. 어느 날 파리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아마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을 거예요. 센 강의 연인들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는데 처음엔 이유도 모르고 울었어요.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며 루브르 미술관까지 걸었죠. 그때 밀려온 게 외로움 그리고 지독한 후회였던 것 같아요. 저렇게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고 있는 동안 난 뭘 한 거지? 그 꽃 같은 시절에 사랑이란 단어만 쏙 빠져있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슬펐어요. 하지만 시간은 이미 흐른 뒤였고 나의 20대를 기억해줄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 젊고 아름다운 몸을 기억하고 있는 남자도.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단 한 순간도 쉬지 말아요. 사랑은 언제나 계속되어야 해요.” 여자 서은영은 사랑을 한다. 사랑은 그녀를 더욱 여자답게 하는 윤활유고,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통해 그녀는 숱한 여자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진심이다. “저의 마음을 여는 비밀번호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진심’이란 단어일 거예요. 하는 일에 있어서든 관계에 있어서든 그것만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적어도 상대방의 진심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어요. 설사 내 판단이 틀렸다 할지라도 믿으며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뢰고, 사랑의 시작이죠.” 송아지 같이 큰 눈망울에 가만히 차오르던 눈물과, 함께 들려준 이야기는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엔 이처럼 인생 선배, 언니로서 들려주는 진심어린 충고가 들어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잖아요. 그런 친구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었어요. 친언니가 친동생한테 해줄 수 있는 진짜 충고들. 10대, 20대 여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 사랑, 패션,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삶의 전반에 관한 질문들을 다뤘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내가 그렇게 느낀 것, 꼭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애썼어요. 꼭 필요한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지침서가 되길 바라요.” 바쁜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책과 영화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는 서은영은 인생에 남을 책으로 존 버거의 를 꼽는다. “사랑에 힘들어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에요. 아흔 살의 작가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절제의 미학이 있어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담담한 언어로 들려주죠. 이 책을 읽고 헤어지려던 사람과 다시 만났어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진실을 담고 있는 문장들은 언제나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테이블 위 작은 액자에 들어갈 가장 행복한 사진의 풍경을 묘사해달라는 질문에 서은영은 양 볼을 살구빛으로 물들이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거기엔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나, 우리 아이가 있을 것 같아요. 셋 다 활짝 웃으면서. 그땐 그냥 청바지에 흰 티셔츠만 입을래요. 소박한 행복이 넘치는 그런 사진이었으면 좋겠어요.”*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본지 7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