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의 후예 || 엘르코리아 (ELLE KOREA)
FASHION

전사의 후예

어느 때보다 여성의 인권과 파워가 이슈가 된 지금, 강인함과 여성성이 공존하는 새로운 의상을 탐험할 시기다

ELLE BY ELLE 2019.04.19


2019 S/S 컬렉션에는 신화와 공상과학을 주제로 한 실루엣과 디테일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흉갑과 솟아오른 어깨, 쇠사슬 모티프, 강인한 부츠와 주얼리, 벨트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봐도 전사의 옷장 그 자체다. 이 트렌드는 패션 검색 엔진 태그워크(Tagwalk)에서 ‘갑옷’을 올 시즌의 새로운 해시 태그로 추가할 정도로 강력하다. “물론 그동안 ‘여성지배자’나 ‘전사’라는 단어도 많이 검색돼 왔어요”라고 검색 엔진 창립자 알레산드라 반 오트(Alexandra Van Houtte)는 말한다. “하지만 갑옷이야말로 올 시즌의 뉴 키워드죠.” 오트의 말처럼 이번 시즌 모든 트렌드는 강인함과 함께 시작됐다. 알렉산더 매퀸은 레이저 커팅을 거친 가죽 에이프런 스커트, 중세시대 군인의 코트, 몸에 딱 맞는 테일러링과 장신구, 터프한 부츠, 바이킹 스타일의 땋은 머리 등을 등장시켰고 발망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강렬하게 솟은 어깨와 코르셋 같은 메탈 가슴판으로 고대 이집트와 에일리언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줬다. 루스테잉의 타이트한 드레스는 마치 산산조각난 거울을 로보캅 복장에 흩뿌려 놓은 것 같다. 끌로에 쇼의 오프닝을 열었던 해변가 ‘모던 히피’ 룩은 쇼가 끝날 무렵 독특한 스톤들이 장식된 디자이너 마리아노 포르투니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전쟁의 여신’으로 변모했다. 릭 오웬스는 좀 더 종말론적이다. 강렬하게 돌출된 재킷, 두건과 기하학적인 헤드피스, 마치 안대처럼 눈을 가린 선글라스 등은 <헝거 게임>의 캐트니스 에버딘(Katniss Everdeen)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런 트렌드를 지난 시즌 발라클라바와 밀리터리 베스트로 거리를 휩쓸었던 워코어(Warcore)의 연장선으로는 보기 어렵다. 이번 시즌 터프함은 부드러움으로 중화됐고, 좀 더 여성적인 선언을 담고 있으니. 끌로에의 여신 드레스는 충분히 로맨틱하고 발망의 아미 룩은 섹시하며, 크리스토퍼 케인의 ‘갑옷’은 레이스와 플리츠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강인함이나 부드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가 결합됐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반 오트가 말한다. “여성이 마땅히 지녀야 할 새로운 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 나오는 일종의 ‘멜팅 폿’과도 같은 것이죠.” 단적인 예로 매퀸 컬렉션의 영감을 살펴보면 여성스러운 레이스와 화려한 꽃이 수놓인 드레스와 스커트 위에 블랙 가죽 피스가 덮여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버튼은 고대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을 탐험했다.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 에이브러리 마을에서 흰색 초크로 그린 말 그림과 원시적 신앙이 담긴 비석,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묘비, 양귀비 들판을 둘러봤고 그건 이교도 여성의 순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영향력 있는 여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싶진 않았어요.” 사라 버튼은 쇼가 끝난 후 백스테이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과 결혼, 우정, 공동체와 관련된 여성의 삶의 여정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고, 이걸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했죠. 우린 굳이 가드를 세우고 감정적이지 않은 척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여성으로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우리의 기원은 두 요소의 조화로부터 시작되죠. 힘과 연약함, 부드러움과 강인함 말이에요.”


브라운스 패션의 우먼스 웨어 바잉 디렉터 아이더 패터슨은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통해 무엇을 상징하고 받아들이는지’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시즌이라고 말한다. “발렌티노는 유동적이지만 분명한 힘이 느껴지는 드레스를 선보였어요. 지방시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뮈글러의 케이시 캐드월라더는 전통적인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에서 균형을 찾을 줄 아는 파워플한 컬렉션으로 브랜드 메시지를 강화했고요. 또 디자인 컬렉티브 머티리얼(Materiel)은 상상력이 풍부한 컬렉션을 통해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완벽하게 융합했죠.” 우린 최근 들어 패션에 너무 많은 것을 대입하고 읽으려 한다. 많은 것을 물으려 하지만, 이것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미투(#MeToo) 운동은 패션계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고, 워싱턴에서 캐버노의 성추행 스캔들이 터질 당시 밀란과 파리 쇼들은 정치적 색채가 짙은 사운드트랙을 택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강인함으로 맞서는 것이 최상의 해답일까? 의견은 분분하고 답을 찾는 관점은 엇갈린다.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박사가 증언하던 날, 릭 오웬스는 쇼를 공개했고 굳이 이런 사안을 겨냥한 건 아니었지만 현 이슈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디자이너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건 시대를 반영하는 여성 파워를 표현하려는 그들의 의지였다. 크리스토퍼 케인과 타미 케인은 ‘성’에 초점을 맞춰 동물의 왕국과 마릴린 먼로의 섹시한 매력에 시선을 돌렸다. 레이스 드레스의 독특한 패널은 란제리의 레이스 장식 크로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속옷의 크로치 부분을 아름다운 레이스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해부학적인 갑옷과도 같은 것이죠. 거의 하트에 가깝게 보이길 원했어요.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1,4 영화 <블랙 팬서> 속 여전사들.
2 1957년 <성 잔 다르크>에 출연한 진 세버그.
3 영화 속에서 잔 다르크로 분한 밀라 요보비치.


에밀리 윌슨 교수의 번역본 <오디세이>(여성에 의한 최초의 번역본이다)에서 영감을 얻은 막스마라의 이언 그리피스는 고전(물론 클래식한 옷장)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의 상상력은 모험을 위한 의상으로 이어진다. 크로스보디백, 원 숄더 셔츠, 허리 부분 매듭을 묶은 스커트, 대담한 선글라스…. 거의 6개월이 지난 지금, 이 컬렉션들은 스토어에서 출시돼 수많은 여성의 출근용 갑옷이 돼주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미국 중간선거에서 기록적인 수의 여성 의원이 선출됐고, 가부장적 태도에 맞서는 글도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다. 가장 최근엔 재닛 윈터슨의 <용기가 모든 곳의 용기를 촉구한다 Courage Calls to Courage Everywhere>, 레베카 트라이스터의 <굿 앤 매드 Good and Mad>,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 Becoming> 등도 완판을 기록했다. 미디어 역시 여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난가을 우린 최초의 여성 ‘닥터 후’의 탄생을 목격했고, 올봄엔 브리 라슨이 첫 여성 단독 히어로인 ‘캡틴 마블’이 됐다. 또 지난 패션 위크가 한창인 시즌, <BBC>는 여성 주도적인 심리스릴러 <킬링 이브>를 내놓았다. 제작자이자 작가 포비 윌러 브리지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과 그 뒤를 쫓는 비밀요원 이브(산드라 오)의 스릴 넘치는 추격전을 통해 여성 캐릭터들을 극대화했다. 사실 TV 속 악역 여부를 떠나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현 패션 트렌드에 비춰볼 때 빌라넬만큼 잘 맞아떨어지는 좋은 예도 없다. 그녀는 핑크 몰리 고다드 드레스와 발렌시아가 보버 부츠 차림으로 등장한다! 올해 역시 <플리백>과 <빅 리틀 라이즈> 시즌이 돌아오면서 우린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얘기하는 여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패션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반 오트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시즌 여성들은 남성적인 옷으로 파워를 강조했어요. 반면 이번 시즌엔 굳이 인형처럼 보이진 않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을 싣는 방법을 택하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강해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옷을 입을 필요는 없죠.” 리얼 웨이에서 이는 허리를 강조한 벨트, 테일러드 페플럼 재킷, 하이웨이스트 팬츠와 매치한 셔츠와 블라우스, 부드러운 드레스와 강인한 액세서리 등의 조합으로 좁혀질 것이다. 하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든 그렇지 않든, 어떻게 입을 것인지에 대한 규칙을 지나치게 타이트하게 정할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내면에 진정한 파워가 존재한다는 사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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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KATIE FINNIGAN
    에디터 이연주
    디자인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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