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향수를 좋아한다. 시간 차를 두고 하루에 최소 다섯가지 이상의 향수를 레이어드할 만큼. 출근하기 전 그날의 기분이나 컨디션, 스케줄 등을 고려해 직관적으로 손이 가는 향수를 뿌리고, 외근 나가거나 잠이 쏟아질 때, 사무실에서 미팅이 있거나 중요한 회의에 들어갈 때 등 매 순간 긴장감과 활력을 주기 위해서도 그때그때 다른 향수를 덧입는 것. 하지만 몇 달 전 시부모님과의 여행에서 조금 민망한 경험을 한 뒤 ‘향수 레이어드에도 원칙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먼 길 떠날 때마다 최소 두세 개의 향수를 챙기는 편이라, 이번에도 벤조인 노트의 이국적인 오 드 퍼퓸과 시트러스 계열의 코롱을 챙겨갔다. 평소처럼 향수를 허공에 수차례 뿌려 그중 일부만 옷과 피부에 안착하게 하는 일명 ‘이탤리언 샤워(이탈리아의 호색한들이 전날 밤 함께 보낸 여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말 그대로 향수로 샤워한다 해서 붙은 이름)’법으로 벤조인 향을 입고, 바람이 불 때마다 발향되도록 머리카락 안쪽에 코롱을 2~3회 뿌린 뒤 차에 탔다. 평소 통 싫은 내색이 없던 시어머니가 헛기침을 몇 번 하시더니 “얘, 이 호텔 비누 향이 좀 진하지 않니?”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넨 것. 아뿔싸, 안 그런 척해도 분명 내가 뿜어내는 향을 저격하고 있었다! 밀폐된 공간인 차에 탈 것을 고려해 좀 덜 뿌려야 했나. 서울로 돌아온 뒤 마침 킬리안 향수 론칭 행사에 참석하게 됐고, 그곳에서 만난 신라호텔 킬리안 매장 남형준 부매니저에게 조언을 청했다. “향수를 레이어드할 때 온몸을 휘감는 건 안 돼요. 밀폐된 공간, 특히 앉아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향이 위로 올라와 테이블 주변을 지배해서도 안 돼죠.” 문득 파티션 너머 다른 팀의 선배와 옆자리에 있는 후배가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내가 그들의 후각을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남형준 부매니저에게 향수를 레이어드하는 올바른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 첫 번째, 잠들기 전 다음 날 입을 옷에 한 가지 향수를 미리 뿌리고,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손목 안쪽과 하의 옷자락에 다른 향을 뿌리는 방법. 자는 동안 향이 날아갈 것을 고려해 묵직하고 매혹적인 킬리안 ‘리에이존스 데인저루스, 티피컬 미’를 넉넉히 뿌렸다. 로즈, 리큐어, 샌달우드, 머스크가 가미돼 비밀스러운 느낌의 향수가 다음 날 아침에 맡으니 크리미한 잔향만 남아 있었다. 옷을 입은 다음 손목 안쪽과 코트, 바지 끝단에 신선하고 이국적인 느낌의 킬리안 ‘문 라이트 인 헤븐’을 뿌렸다. 우윳빛이 연상되는 전자의 잔향에 후자의 시트러스 과즙 향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출근 직전 옷에 향수를 뿌리고 곧바로 만원 지하철을 탈 때마다 느꼈던, 주변 공기와 사람들이 내뿜는 입김이 내 머리 위를 지그시 누르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두 번째, 메인 향수를 평소처럼 뿌리고 이와 어우러지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서브 향수를 겉옷과 가방에 살짝 더하는 방법. 좋아하는 향수 톱 5에 드는 르 라보 ‘상탈33’을 공기 중에 뿌리고 뱅그르르 돌아 전신에 향이 고루 입혀지도록 한 뒤, 코트와 에코백에 르 라보 ‘가이악 10’을 뿌려줬다. 쌉싸래하고 강인한 건초 향에서 점차 부드러운 매력을 발산하는 ‘상탈 33’에, 피부에서 은은하게 배어져 나올 듯한 ‘가이악 10’ 향이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만 서브로 뿌린 향이 살갗에서 날 것 같은 여성스러운 머스크 향인데, 정작 외투와 가방에만 뿌리니 실내에선 그 합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향수 컴바이닝의 대표 브랜드인 조 말론 런던 교육팀 김수진 부장의 어드바이스가 신의 한 수가 됐다. “피부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서서히 발산돼 살갗의 향처럼 표현되길 원한다면 공기 중에 분사하는 대신 맥박이 뛰는 부위에 뿌리세요. 그다음 코트 안쪽이나 머리카락에 또 다른 향수를 뿌리는 거죠. 향수를 뿌린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훨씬 은은하게 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그리하여 시도한 세 번째, 메인 향은 살갗에 뿌리고 서브 향은 옷 안쪽이나 머리카락에 뿌리는 방법. 보디 앤 핸드 워시로 즐겨 썼던 조 말론 런던 ‘블랙베리 앤 베이 코롱’을 손목과 귀 뒤, 무릎 뒤쪽과 발목에 뿌리고 빗에는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을 뿌려 머리를 빗었다. 솔직히 짭짤한 소금 내음이 나는 향수를 좋아하지 않아 후자는 단독으로 뿌리길 꺼린 제품. 하지만 전자의 따뜻하고 싱그러운 향에 더해지니 웬걸, 천상의 목가적인 향이 완성되며 내가 ‘자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더라. 코트 안쪽에 뿌린 덕분에 안에 입은 셔츠에도 자연스럽게 후자의 향이 뱄고,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전자의 잔향에 후자의 잔향이 훅~ 치고 들어오며 리프레시되는 효과까지!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간 차를 두거나 뿌리는 위치를 굳이 구분하지 않고 피부에 직접 널찍이 분사해 향이 한데 믹스되도록 하는 방법. 말만 들어서는 리스크가 가장 커 보이지만 ‘조화로운 노트들을 더할수록 좋은 향기가 완성된다’는 남형준 부매니저의 조언에서 힌트를 얻어 같은 계통의 노트끼리 함께 뿌려보기로 결심, 킬리안 ‘블랙 팬텀, 메멘토 모리’와 ‘인톡시케이티드’의 조합을 선택했다. 전자는 나무 향이 더해진 럼주와 진한 커피 느낌에 사탕수수의 감미로움이 살짝 가미된 향이고, 후자는 진한 터키 스타일의 블랙 커피에 바닐라, 시나몬 에센스가 더해진 향으로 모두 ‘커피’라는 공통 노트를 지닌, 육감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이미지의 향수. 첫날은 나를 나무라던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 데콜테 쪽에 하나, 등쪽에 또 다른 하나의 향수를 조금씩 뿌렸다. “첫인상과 잔상을 다르게 연출하고 싶을 때 좋은 방법이에요. 마주했을 때와 뒤돌아갈 때 다른 감성을 전달할 수 있죠.”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나름 전문적인 향수 레이어드 방법일 줄이야, 김수진 부장의 설명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방법에 익숙해지자 좀 더 과감해지고 싶어 늘 뿌리던 방법인 ‘이탤리언 샤워’법을 다시 동원해 보기로 결심. 다만 좀 더 자연스럽고 광범위하게 내 몸에 향이 입혀지도록 공기 중에 넓게 흩뿌렸다(향수 아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어라, 기대 이상이다! ‘1+1’이 ‘2’가 아닌 ‘3’이 되는 기분. 시차 때문에 잠 못 이루고 깨어난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마신 커피 향 같기도 하고, 일탈하고 싶어 찾은 뉴욕의 재즈 바에서 마신 칵테일 향 같기도 하고, 커피라는 공통분모에 개인적인 추억까지 더해지니 두 향의 시너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게 눈앞에 그려질 정도였다. 당시 시어머니의 후각을 공격한 건 ‘벤조인’과 ‘시트러스’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노트의 부조화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자, 지금까지 시어머니의 눈칫밥을 먹은 뒤 향수 레이어드 준전문가로 거듭나게 된 스토리였다. 매일매일 다채로운 일들을 경험하며 10초가 멀다 하고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는 요즘, 과연 나의 시그너처가 될 ‘단 하나’의 향수를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 조향사가 되어 매 순간 나를 위한 맞춤 향을 찾아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그러니 앞서 적은 방법을 따라해 보며 당신만의 향수 칵테일 레서피를 찾길 바란다. 인간의 후각 능력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기에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는다면 어느 순간 손쉽게 향수 레이어드 마법을 발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센슈얼한 우드 향이 매력적인 상탈 33, 100ml 35만5천원, 잔잔한 우디 머스크 계열의 가이악 10, 100ml 60만원, Le Labo. 과일 노트와 로즈 노트의 조화가 매혹적인 리에이존스 데인저루스 티피컬미, 레몬과 생자몽이 어우러진 시트러스 노트의 문 라이트 인 헤븐, 각 50ml 34만원대, Kilian. 짭짤한 바람이 부는 해변에 있는 느낌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생기 가득한 블랙베리 앤 베이 코롱, 각 100ml 18만6천원, Jo Malone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