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로 떠오른 그녀, 전여빈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우리 곁에 오래 남을 배우가 되기 위해 천천히 돌아온 전여빈, 그녀가 찾아왔다::전여빈, 죄 많은 소녀, 해치지않아, 천문, 영화배우, 배우, 화보, 스타, 인터뷰, 엘르, elle.co.kr:: | 전여빈,죄 많은 소녀,해치지않아,천문,영화배우

화이트 셔츠와 팬츠는 모두 Koominsung.스웨터는 Neul.이너로 입은 니트와 스커트는 모두 Vartist. 베이지 코트와 로퍼는 모두 Dior.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촬영이 끝나고 인기척이 사라진 카페는 텅 빈 골목처럼 느리고 잔잔했다. 그곳에 온기 어린 목소리로 전여빈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새겨졌다. “명절에 저와 엄마, 오빠와 남동생 넷이서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데 지난 추석은 예년과 사뭇 달랐어요. 엄마가 호박전을 부치면서 그 위에 피망과 쑥으로 장식했어요. 그렇게 만든 건 처음이었는데 꽃처럼 예뻐 보였어요. 성묘를 마친 뒤 가족과 늘 가는 카페에 들렀을 때 평안함이 느껴졌어요. 예전의 분위기는 되게 슬펐거든요. 다 같이 슬픔을 억눌렀어요. 그런데 그날은 우리 가족에게 전에 없던 안정감이 생긴 것 같았어요.” 전여빈은 올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한창 얘기하고 있었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변혁에 가까운 변화를 맞은 배우가 가장 평범하고 내밀한 일상의 순간에 진심을 둔다는 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죄 많은 소녀>는 세상에 전여빈이란 이름을 풀어놓았다. 친구의 죽음 이후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내팽개쳐진 소녀의 외롭고 서글픈 분투를 담은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입술이 닳도록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죄 많은 소녀>에서 입을 굳게 다문 전여빈의 얼굴이 주되게 길어 나른 감정은 고통, 억울함, 죄책감, 분노.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가 깨진 채 짓이겨진 것을 본 안타까움이랄까. 가냘픈 몸을 던져 글자 그대로 ‘무너지는 육체’를 표현한 그녀는 얼음송곳 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했다.2017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주저 없이 ‘올해의 배우상’을 건네며 이에 화답했고, 올해 관객의 마음에 감정의 소요를 일으킨 전여빈은 대체 불가한 ‘괴물 신예’ ‘최고의 발견’으로 부상했다.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전여빈이 스스로 자라온 지난 시간의 사연들도 하나둘 알려졌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서 ‘나도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연극 스태프로 시작해 뒤늦게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문소리가 찍은 단편영화를 보고 ‘문소리 감독님, 저와 함께 작업해 주십시오’라고 SNS에 올린 일도 있다. 이를 모른 채 문소리는 전여빈을 눈여겨본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그녀에게 연락했고, 문소리의 연출작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신인배우 역을 능청스럽고 당돌하게 연기한 배우가 바로 전여빈이었다. 그리고 불안이 쏟아져 내리던 시기에 기적처럼 <죄 많은 소녀>가 찾아왔다. 이 모든 일화에는 ‘성장의 서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자신의 장점으로 ‘지구력’을 꼽은 전여빈은 순탄치 않았던 발효의 시간 속에서 배우의 길을 고집스럽게 헤쳐왔다. “인생이 마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요. 연기를 붙잡고 나름 열심히 하는데 진전은 없고 시간만 흘렀어요. 내가 연기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러던 시기에 <죄 많은 소녀>를 만났어요. 이 작품을 통해 연기를 계속해도 좋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았어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지켜본 가족들에게 그 마음이 전해졌나 봐요. 다 같이 모이는 명절에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올해는 떳떳했어요. 엄마가 크게 기뻐하셨죠. 엄마는 살면서 한 번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 없으셨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응원해 주세요.” 짧은 시간에 전여빈이란 사람을 100%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에게 2018년을 마무리하는 시간도 결코 허전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사람들이 전여빈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연기를 즐거운 놀이처럼 여기던 그녀에게 치열한 현장의 열기를 움켜쥐어 준 <죄 많은 소녀>는 전여빈의 세계가 한층 넓어지는 계기가 된 운명적인 작품이지만 결코 오르막의 정점은 아닐 것이다. ‘올해의 발견’이라는 단어로 가두기에 전여빈은 채운 것보다 앞으로 채울 것이 더 많다. 인터뷰하는 내내 <죄 많은 소녀>에서 볼 수 없던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 것처럼 한창 촬영 중인 두 편의 영화에서도 그녀가 무언가 뜻밖의 기층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폐업 직전의 동물원을 살리기 위한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를 그린 <해치지않아>에서는 사육사 캐릭터를,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 <천문>에서는 최민식이 연기하는 장영실의 제자 역할을 맡았다. 전여빈은 기대감과 설렘을 드러내기보다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새로운 현장을 만나면서 리셋됐어요. 의상을 입고 그 공간에 있는 모습은 제가 봐도 낯설고,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모든 게 처음 겪는 일 같이 느껴져요. 문소리 선배님이 “배우는 한 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시작하고 태어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제야 이해가 돼요. 제 바람은 오래 연기를 해온 선배들과 극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거예요. 조화로운 풍경처럼 잘 섞이고 싶어요.”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온 배우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미 기억할 만한 장면들을 보여준 전여빈은 그것을 충분히 해낼 뿐 아니라 다른 밀도의 풍경을 완성할 거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꿎은 힘을 쏟지 않으려는 태도는 연기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필모그래피에서 배우 전여빈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에 그녀는 “열심히 했던 인스타그램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제가 스스로의 모습을 편집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예요. 사진을 올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던 거예요. 제가 나온 작품 가운데 어떤 장면을 봐달라고 고르기도 어려워요. 배우는 계속해서 자기도 모르는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배우인지 궁금하다면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저를 알아가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문소리가 어느 인터뷰에서 전여빈을 두고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신경 쓰지 않는 배우”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전여빈을 만나기 전, 그녀에 대해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자기 소개를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연기를 많이 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배우에게 이보다 더 인간적인 소망이 있을까. 그래서 그 말이 더 순정하게 느껴졌다. 열망하던 것을 이루고 한층 견고한 삶을 맞이한 전여빈에게 앞으로 펼쳐질 시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이런 장난 아세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봐, 캄캄하지? 이게 네 미래야’ 어릴 때 계획 세우길 좋아했는데 커가면서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앞으로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모르지만 매 순간 열심히 살았으면 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예전에 엄마의 기대가 너무 부담스럽고, 실망을 주기 싫어서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거야. 그러니까 엄마가 너무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도 엄마는 들떠 하며 ‘엄마는 최선을 다해 엄마 역할을 하는 거야. 일에 대한 결과는 네 몫이고, 엄마는 이렇게 마음을 다 써야 나중에 후회가 없어. 실패할까 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몸을 사리는 건 비겁해’라고 하셨는데 그 얘기가 크게 와 닿았어요.”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커다란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작품이든 사람이든 새로움을 경험하고 있는 전여빈은 요즘 카오스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혼돈과 무질서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까이서 바라보고, 느껴보고 싶은 낯선 세계. “배우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배워야 할 것이 많더라고요. 용기를 내 하나하나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어요.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지금 이 시간을 잘 보내면 아름다운 공식을 만날 것 같아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전여빈이 관통하고 있는 시간은 훗날 환대하게 될 어마어마한 세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우리 곁에 오래 남을 배우가 되기 위해 천천히 돌아온 지난날의 시간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세상에 서는 방법에 서툴렀던 그녀가 영화 속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전여빈은 또 다른 경계의 출발점에 섰다. 우리는 성장을 거듭하며 최선을 다해 동시대의 배우로 살아갈 전여빈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