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창 좋아하며 데이트 하던 파리에 사는 남자가 있다. 그를 ‘파리 남자’라고 부르자. 여러 달을 데이트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상당히 커졌을 무렵, 드디어 같이 밤을 보내게 되었다. 처음 함께하는 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기쁘고 설레기보단 곧 그와 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내 나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옆에서 곤히 자던 파리 남자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우리는 냄새가 잘 맞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절 펜할리곤스의 ‘피오니브’를, 그는 크리드의 ‘오리지널 베티버’를 썼다. 물론 각자에게는 잘 어울리는 향수였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할 때 그 두 향의 조화와 시너지는 전혀 없었다. 그를 굉장히 좋아하던 나는 그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랬지만, 결국 한달 안에 우리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그와 헤어진 뒤에도 나는 그 향수를 제법 오래 썼다. 미운 건 향수가 아니니까. 피오니브는 아직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향 중에 하나다. 그래서 최악의 향수는 아니다. 다만 그의 향과 캐미스트리가 맞지 않았을 뿐.한번은 향수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그를 ‘향수회사 남자’라고 부르자. 굉장히 큰 향수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며 향기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마냥 신기해했다. 그는 향보다는 숫자에 관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향수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늘 겉돌았다. 그는 항상 숫자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간혹 내가 향수의 이미지나 서정성에 대한 질문을 해도 그의 대답은 언제나 숫자로 끝나곤 했으니깐. 그는 가끔씩 내게 향수를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그 선물 또한 항상 문제였다. 이미 내가 구입했거나, 다른 사람이 내게 선물했거나, 아니면 내가 싫어하는 향수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일부러 작심이라도 한 듯 늘 그런 향수들만 선물했다. 차라리 선물을 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와의 숫자 대화도, 집에 쌓여져 가는 향수 선물들도 모두 내겐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우린 끝났다. 그래도 헤어지고 나서는 그에게 선물 받은 향수들이 꽤 유용해졌다. 미련 없이 어울리는 지인들에게 선물했으니까! 그러니 이들도 최악의 향수라고 할 수는 없다.홍콩에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를 ‘홍콩 남자’라고 부르자. 우리는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나는 사이였다. 그는 서울에 올 때 선물을 한아름 사오곤 했다. 비싼 물건은 별로 없었지만, 껌 한 통을 받아도 까무러치게 기뻐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그 선물더미 안에 향수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바이레도의 ‘라 튤립’이었다. 그는 내 이미지에 어울리는 향수라고 했다. 튤립의 청아하고 우아한 향기을 담은 ‘라 튤립’은 맑고 푸른 첫 향취로 시작해 분가루처럼 부드럽고 고혹적인 잔향을 남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향수는 나와 전혀 맞지 않는다. 오히려 바이레도의 ‘모하비고스트’가 더 잘 어울릴 듯. 향수회사 남자가 이상한 향수 선물을 주면 쥐 잡듯 잡았던 나지만 이번엔 그냥 이 오빠가 날 그런 청아한 이미지로 보는구나 하고 넘겼다. 그땐 모든 것이 좋을 때였다. 그런데 한참 그를 만나던 중 왠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SNS 뒷조사를 해보니 그 인간이 똑같은 향수를 다른 여자에게 선물로 준 게 아닌가. 게다가 그녀와의 데이트 코스도, 함께 먹고 마시던 메뉴까지 모두 똑같았다. 양다리에서 끝이 아니었다. 세 네명의 여자들이 줄줄이 더 발각되었다. 창의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이 동시에 문어다리를 걸치느라 애써 짜낸 루틴한 데이트 매뉴얼이었던 것이다. 매력이 각기 다른 여러 여자에게 같은 향수를 선물하다니! 최악의 남자가 골라온 내 이미지와 1도 맞지 않는 라 튤립은 그렇게 내 인생 최악의 향수가 되었다. 물론 바이레도에겐 아무 감정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