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츠 디테일이 가미된 블랙&화이트 원피스는 Maje.
‘관록의 여배우’란 수식을 썼다가 다시 지운다. 35년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주연 자리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온 베테랑. 그러나 단지 경력이나 권위에 기대어 김희애란 배우를 설명하는 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JTBC 드라마 <밀회> 당시 유아인과 함께한 <엘르> 커버 화보는 편집부에서 레전드로 꼽힌다. 주변을 숨죽이게 만든 김희애의 열정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에디터와 스태프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된다(이를 언급하니 “에이, 유아인 씨 덕분이죠”라며 웃어넘긴다). 또 한 번 ‘김희애의 파격’을 보여줄 화보를 찍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으나, 이번 만남의 스포트라이트는 작품 그 자체에 두기로 한다. <허스토리>는 그만큼 귀한 영화니까.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사건,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벌인 ‘관부 재판’을 다룬 작품. 완성된 영화는 피해자인 할머니들의 참혹한 상처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판장에서 당당히 맞선 그들의 의지와 용기를 통해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한다. 김희애가 연기한 원고단 단장 ‘문정숙’은 부산의 사업가이자 할머니들을 도우며 긴 재판을 이끌어가는 인물. 멋스러운 복고풍 정장을 입고 성큼성큼 걸으며 어떤 순간에도 투지를 잃지 않는 문정숙은 <허스토리>가 지닌 활력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블랙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기대앉은 오늘의 김희애는 마치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한 한 명의 무용수를 보는 것 같다. 성실하게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온 예술가의 내공이란 이런 것이겠지. 그러나 카메라가 꺼진 뒤에는 조그만 찬사에도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는 소탈한 모습. <허스토리> 출연에 대해 “안 할 이유가 없었다”는 심플한 답변이 얼핏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의 무게보다 가볍게 들릴지 몰라도, 이 숙제를 받아든 그녀가 얼마나 맹렬하고 치열한 시간을 보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면 속에서 웃고 우는 김희애를 바라보며 누군가의 역사도 조금 바뀔지 모른다.
블랙 톱과 저지 펜슬 스커트는 Ck Calvin Klein.
제목부터 시사하는 바가 큰 영화입니다. ‘문정숙’을 연기한 소감은 처음엔 좀 더 쉽게 생각했는데, 저로서는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어릴 때는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해도 용납되지만, 지금은 못해내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어요. 보통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작품에서 내가 ‘발연기’를 하면 안 되잖아요. 절대 타협하면 안 된다, 할 때까지 해보자, 그런 마음이었어요.
복고풍의 정장과 안경, 문 사장의 패션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오늘 입은 화이트 수트도 근사하게 어울리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수트가 편한 것 같아요. 요즘은 스트리트 패션이 인기라 정장을 잘 안 입잖아요. 수트를 입으면 편안하면서도 멋스럽고 갖춰 입은 느낌? 좀 더 파워플해 보이기도 하고요.
<허스토리>를 선택하게 된 건 나이 든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작품이란 게 한정적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너무 매력적인 작품이죠. 법정 드라마고 여자가 당당히 설 수 있는 작품이어서 시작하게 됐어요. 제가 사명감 운운하는 건 부끄러운 일 같아요. 시작하고 보니 내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았구나 싶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정말 진심을 다해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힘들 때는 ‘우리 할머님들은 더 힘든 세월도 견디셨는데, 이 정도로 엄살 부리면 안 돼’라며 다독이기도 했고요.
재판 얘기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문정숙이란 인물 자체의 개성이 드러난 점이 좋았어요. 승부욕 넘치는 사업가, 대장부, 리더의 모습요 맞아요. 대리만족을 느낄 만큼 멋진 인물이죠. 1990년대에 여자로서 사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분이 우연한 기회에 할머니들의 사연을 접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 부끄러워서’ 할머니들을 돕게 되고 그 일에 매진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와닿았어요.
일본어 대사보다 부산 사투리가 더 어려웠다고요 어휘만 그냥 외워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경상도 사투리도 영어처럼 악센트가 있더라고요. 한번 녹음해서 들어봤더니, 내가 들어도 이상한 거예요. ‘연기가 문제지, 사투리가 문제야?’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죠. 그다음부터 ‘아, 나도 정말 사투리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부산이 고향인 배우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내는 일하는 게 좋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어쩐지 배우 김희애가 겹쳐 보이기도 했고요 맞아요. 저도 워낙 아침형 인간이라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여요. ‘오늘 한번 마음먹고 쉬어보자’ 해도 슬금슬금 이불 속에서도 뭔가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정답은 아닐 수 있어요. 반대로 살아서 편하면 그게 그 사람의 퍼스낼러티인 거죠. 다 자기 생긴 대로, 색깔대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함께 출연한 할머니 역의 배우들도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셨죠. 언론시사회 때 보니까 다들 개성이 뚜렷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내공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죠? 세월은 무시 못한다니까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고 늘 해오던 거니까… 하던 구력으로 그냥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본인의 신을 앞두고 되게 떨고 긴장하시는 모습이 신선했어요. 해오던 대로 숟가락만 올려놓는, 그런 게 절대 아니었어요. 연기라는 게 참으로 고귀한 작업이란 생각이 들었죠. 나이 들었다고, 오래 해왔다고 대충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저분들이 저 연세까지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구나. 그런 자세가 존경스럽고,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 특별히 마음에 남은 건 언론시사회 때 감독님도 얘기했지만, 이 할머니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요. 힘든 인생을 살아왔고, 젊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는 비주류…. 그런 분들이 일본 재판장에 서서 자신을 드러내고 그처럼 당당하게 싸웠다는 것. 그 배경, 그 이야기 안에 있는 게 너무 좋았죠.
문정숙과 할머니들 외에도 바쁜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문정숙의 딸, 친구 신 사장(김선영 배우)과의 진한 우정, 재판을 돕는 일본후원회 여성들까지, 다양한 여자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어요 알고 보면 여자들이 참 의리가 있어요. 요즘 왜 다들 딸을 낳으려 하겠어요(웃음). 공감하는 능력과 섬세함이 여자들의 강점이죠. 남자인 감독님이 그런 여자들의 감정선을 이해하고 각본을 쓴 게 놀랍죠.
등 부분을 컷아웃한 점프수트는 Maje. 블랙 페이턴트 펌프스는 Christian Louboutin.
화이트 숄칼라 재킷은 Escada. 블랙 앵클 부티는 Jimmy Choo.
민규동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완벽주의자예요. 나를 너무 힘들게 했어요.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감사해요. 연기를 오래 했다고 해서 그냥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가게 만들더라고요. 저를 다시 신인처럼 만들어준 담금질 과정이었다고 느껴요.
전작 <사라진 밤>에서 짧지만 강렬한 역할을 선보였어요. <엘르>에 실렸던 유아인과의 커플 화보는 지금 봐도 놀라워요. 그런 도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거죠. 연기할 때, 화보를 찍을 때, 그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감사한 것 아니겠어요? 나중에 돌이켜보면 더 그렇고요. 저는 지금도 공부하고 노력하거든요. 고개만 돌려봐도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다들 전문가이고, 각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나요. 그에 비하면 전 너무 가진 게 없어요. 양심이 있지, 어떻게 노력을 안 하겠어요.
어떤 분야든 한 여성이 30년이 넘도록 커리어를 쌓아왔다는 건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열심히 살았어요. 그렇다고 내가 잘해서 된 일은 아니고, 운이 좋았던 게 절반 이상인 것 같아요. 본인이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게 이 직업이고, 또 안 하고 싶어도 자꾸 하게 되는 게 배우의 운명이니까요. 원 없이 했어요. 최선을 다했고요.
김희애의 허스토리, 그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꼽는다면 그 모든 거죠. 과거의 안 좋았던 순간마저도. 실패하지 않은 성공한 사람이 어디 있나요? 둘 다 동반돼야 하는 거고, 저도 크고 작은 저만의 실패와 성공이 있었어요.
이번 화보를 준비하며 케이트 블란쳇 사진을 많이 참고했어요. 실제로 비슷한 나이기도 하고, 광고 행사차 만난 적도 있다고요 좋아하는 배우예요. 되게 소탈하고 솔직하고 인간적이더라고요. 훌륭한 배우는 역시 개인으로도 훌륭하다는 걸 느꼈죠. <블루 재스민>을 봤다고 하니까, 한국 아줌마들이 수다 떨 듯이 이야기를 꺼내놓더군요. 그분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는 게 다 이런 까닭이구나 했어요.
최근에 보고 좋았던 영화나 눈에 들어온 배우가 있나요 문뜩 떠오르는 작품이 <쓰리 빌보드>네요. 프랜시스 맥도널드의 연기를 보러 갔다가 샘 록웰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연기를 세련되게 잘하는지… 최고였어요. 영화란 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한정된 금액의 돈으로 세계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잖아요. 그들도 아마 그 연기를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거예요. 그런 결과물을 그냥 보고 누린다는 것, 짜릿하지 않아요? <허스토리>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몇 달 동안 잠 못 자고 연습했던 대사를 그냥 편히 앉아서 보시면 되잖아요(웃음).
김희애란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 대본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나요 아쉽죠.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인생이란 그런 것. 그 안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예요. 또 영원한 건 없잖아요. 내일은, 또 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이제 두 아들도 많이 컸고 엄마를 덜 필요로 할 것 같은데, 본인만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온종일 무지 바빠요. 아침부터 할 일 후다닥 하고, 잘 때 되면 ‘아, 오늘 할 일 다 했다’ 하고 너무 시원하게 자요. 죽음도 그럴 것 같아요. 죽은 뒤 미지의 세계가 두렵고 무서우면서, 또 한편으론 ‘살면서 할 숙제 다 했다! 이제 더 숙제 안 해도 된다!’며 시원해할 것 같아요.
좀 더 특별했던 이번 숙제를 마치고 일어난 변화가 있을까요 글쎄요,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진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